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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

[송종의 회고록][전문]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8)

2부 가필(加筆) ⑧ 시절을 잘못 만난 부장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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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떳떳해야 검사가 떳떳하다


국정수행과 인간관계의 기본은 소통이다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장

(1982. 08. 16. ~ 1985. 03. 11.)

 
나는 검사로 임관된 1969년 5월 1일부터 만 13년 3개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부장검사가 되었다. 그것도 검사라면 모두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의 수도검찰청인 서울지방검찰청 본청의 부장검사가 된 것이다.


당시는 검사의 직급이 있었던 때이므로 법무부 법무과장도 본청의 부장검사와 같은 고등검찰관으로서 서울고등검찰청의 검사로 겸직 발령받아 흔히 부장검사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는 하였으나 이는 통칭에 불과할 뿐, 사실상의 부장검사는 아니었다.

나는 서울지방검찰청의 특수 제3부장으로 만 1년, 특수 제1부장으로 만 1년 7개월, 도합 2년 7개월간 특별수사부장으로 근무하였다.

당시의 서울지검 본청의 특별수사부는 3개 부로 되어 있었다. 모두 제3차장검사 소관이었으나 특별수사 제2부라는 부서는 서울지방검찰청의 직제에만 명시되어 있었을 뿐, 실제로는 제1부와 제3부 두 개 부서만이 가동되고 있었을 따름이다. 특별수사 제2부는 오래전부터 청와대 등 다른 부처에 검사의 직책을 가지고 파견되어 근무하던 사람들의 보직 관리를 위해 운영되고 있었다.

내가 특별수사 제3부장으로 발령받던 때, 제2부장은 국보위에 파견 근무 중인 사법시험 동기생 J 씨였다. 그러나 부장검사실도 없었고, 그 소속 검사도 없었으므로 검사들의 사무실도 물론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특별수사 제1부장으로 발령받던 때, 특별수사 제2부장은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였던 제6공화국의 황태자라고 불리던 P 씨로 발령되었다. 나의 사법시험 기수는 제1회였고, 특수 제3부장은 사법시험 제2회였으나, 사법시험 제8회인 그가 특수 제2부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그 직책을 맡고 있던 기간에도 그의 사무실이나 소속 검사는 역시 없었다.

대구지검 검사 시절부터 이 특수 제3부장 시절까지의 일로 기록된 내용은 나에게 없으므로 여기에 기록되는 사실은 전부 나의 기억에 따라 기술된 것이다.


검찰 관련 자료를 몇 번에 걸쳐 폐기하다 보니 특별수사 제1부장 이전의 모든 기록은 남지 않았다. 1984년 1월부터 기재된 업무 일지의 내용은 특별수사 제1부장으로 근무한 내용 중의 일부분이다.

부장검사라는 용어는 검찰의 일선 수사에서 멀어진 것을 뜻한다. 당시에 형사부의 부장검사에게 중요한 사건이 배당되어 부장검사가 주임 검사로 직접 수사하는 사례도 더러 있었으나, 특별수사부장이 주임 검사로 된 사건은 한 건도 없었다. 오직 소속 검사를 지휘할 책임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형사부장처럼 소속 검사가 처리하는 사건의 결재와 지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수부 소속 검사들을 지휘하여 사건을 수사하고 처리하는 것이므로 사건 기록에 성명 3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 뿐, 사실상 이 특별수사부장이 사건의 주임 검사나 다름없었다.

나는 2년 7개월을 그런 자세로 근무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나의 근무 기간 중에 특별수사부에서 처리된 모든 사건은 결국 내가 주임 검사였던 사건이다. 수사의 전 과정에 걸쳐 작성되는 모든 보고서와 수사를 끝낸 다음의 종합결과보고서는 물론, 언론에 발표될 보도 자료는 거의 한 건의 예외 없이 직접 내 손으로 작성되었다. 수사 검사들이 오직 수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나의 특별한 배려였던 것이다.

나의 특수 제1부장 재임 중인 1985년 2월 28일 발간된 『서울지방검찰사』를 잠시 훑어보니 위 검찰사에는 1983년 12월까지의 주요 사건 내용이 기재되어 있으므로 이는 대부분 내가 특수 제3부장 시절에 처리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위 기간 중 중요한 사건으로 명시되어 기록으로 남겨진 16개의 사건 중 9개의 사건이 내가 특별수사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처리한 사건임을 알 수 있었다.

특별수사부의 운영에 관하여 당시 불문율로 여겨지던 관행이 있었다.

특별수사 제1부는 당시 1개 과로 운영되던 사무국의 수사과가 소속되어 있는 부서이다. 10여 명의 수사관을 포함하여 40명 가까운 검찰 일반직이 소속된 수사과의 인원 모두가 특수 제1부장의 지휘하에 있었다. 따라서 특수수사 제1부가 아닌 다른 특수부에서 이 수사과 직원을 활용하여 수사하려면 반드시 특수 제1부장의 허락을 얻어야 비로소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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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인 법무부 장관(왼쪽)에게 보고하는 당시 송종의 서울지검 특수제3부장

 

특수 제1부는 검사장의 특명에 따라 수사하는 책임이 있는 반면, 이런 권한도 있었다. 그 대신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면서 특명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부서였으므로 소위 생색나는 수사를 벌이는 경우가 드물어 이런 경우는 대개 특수 제3부에서 처리하고, 소리 소문 없이 수사하여 매듭을 지어야 하는 사건들은 특수 제1부장의 책임 아래 처리되었다. 내가 특수 제1부장이 되었을 때도 이런 관행에 따라 특별수사 제3부로 하여금 자유롭게 수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은 당연하다.

내가 특수 제3부장으로 발령된 때, 나름의 결심이 있었다. 단발성 범죄 정보에 따라 처리하는 사건보다도 소위 기획수사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는 사건을 수사하여 처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검사가 어떤 특정한 범죄의 내용을 인지하여 수사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이를 반드시 특별수사부가 처리해야 할 사건은 아니다. 검사라면 당연히 수사해야만 하는 이런 사건보다도 국가나 사회의 고질적인 비리를 밝혀내어 그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해 벌이는 기획수사가 바로 특별수사부에서 처리되어야 할 수사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검사가 점쟁이가 아닌 다음에야 사회에서 일어나는 특정 사건의 정보를 정확히 입수하여 수사를 벌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뿐더러, 이런 사건은 속칭 단발 사건에 그칠 것이다.

위 『서울지방검찰사』에 기록된 사건 중 특이한 사건은 상습무고사범과 위증사범의 단속이다. 4번에 걸쳐 이 사건을 수사하여 처리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검사라면 이 무고와 위증이란 것이 얼마나 고약한 범죄인지는 모두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형사사법 정의의 구현을 저해하는 대표적인 것이 이 두 가지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법에 이 두 가지 죄는 개인적인 법익을 침해하는 죄가 아닌, 국가적인 법익을 침해하는 죄로 분류되어 있다. 위증의 죄가 형법 제10장에, 무고의 죄가 형법 제11장에 규정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무고(誣告), 위증(僞證), 사기(詐欺), 사칭(詐稱), 위조(僞造), 위계(僞計), 허위(虛僞)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죄가 형법에 많이 규정되어 있다. 이런 죄에 공통되는 본질적 요소는 ‘거짓’이다.

사기, 사칭, 위조, 위계, 허위, 이런 것들은 대부분 재물이나 명예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그 피해가 사람의 생명이나 안위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무고죄는 물론, 위증 특히 모해위증이라는 죄에 들어가 있는 거짓이라는 놈은 사람의 신변에 치명상을 가하는 것이므로 다른 죄의 거짓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이런 거짓은 형사 또는 민사 사건의 진실을 호도하여 사법 정의의 실현이라는 본질적인 국가 기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인 자연인의 생명과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범죄다. 한마디로 범죄 중에서도 아주 고약한 범죄다.

우리나라의 역사책 중 『이조실록』 한 종류만을 읽어 보더라도 이 무고와 위증 때문에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사람의 팔자가 뒤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참소(讒疏) 또는 모함(謀陷)으로 얼마나 많은 관리와 선비가 피해를 보았던가? 많은 사람이 중형을 선고받아 불귀의 객이 되었거나 귀양살이를 했다. 그 사람들에게만 피해가 있었을까? 아니다. 그의 삼족(三族)을 멸(滅)한 때도 있었고, 본인의 사후에 부관참시(剖棺斬屍)라는 야만적인 국가 형벌권 행사가 이어진 때도 있었다.

들먹거리기조차 싫은 그 많은 사화(士禍)라는 역사가 이를 생생히 증명한다. 이런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무고와 위증이란 두 범죄에 있어서만은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단연 최고다. 범죄 통계학적으로도 전 세계에서 1등이다. 인근 일본의 범죄 백서를 보면, 이런 무고와 위증의 죄는 우리나라의 몇 십 분의 일도 안 된다.

내가 평검사로 근무하면서 이 무고와 위증이란 고소 사건으로 고생한 일은 도저히 글로 쓸 수 없을 정도다. 고소 사건을 조사하다가 그 고소가 허위임을 밝혀내 구속된 피의자에게 채운 수갑을 풀어 고소인의 손목에 바꿔 채운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일을 치르며 ‘내가 왜 판사를 지망하지 않고, 검사가 되어 이 험한 일을 겪는가?’라고 푸념을 늘어놓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사건 1건을 처리하는 것이 보통 형사 사건 100건을 처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때도 있다. 우리 검찰의 형사부 검사가 얼마나 힘든 직업인일까?


검사의 이런 애로를 알아주는 국민은 많지 않다. 그러나 알아주든, 몰라주든, 검사라면 이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오직 검사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고죄는 물론, 위증죄에 혐의가 밝혀지는 때, 나는 거의 그 사건을 불구속으로 처리한 적이 없다. 무고사범은 물론, 대부분의 위증 사건도 예외 없이 직접 구속했다. 이 두 죄의 본질이 거짓이므로 이런 사람들은 모두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증 피의자를 무고사범처럼 엄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예외적으로 몇 건을 불구속으로 처리한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위증인지 아닌지의 수사는 법원 직원이 작성한 공판정에서의 증인신문조서를 근거로 그 조서에 기재된 진술 내용이 허위인지의 여부를 가려 보는 것이다.

요즈음의 재판 실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옛날에는 공판정에서 증인이 진술한 증언 내용을 법원 직원이 그대로 녹취하여 증인신문조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증인의 진술을 들은 법원 직원이 그 요지를 조서에 기록한 것이 증인심문조서이다.


물론 재판장이 그 기록이 들어 있는 공판조서에 날인하지만, 그 조서에 기재된 증언 내용이 증인의 진술 내용과 일치한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다. 위증 사건을 수사하다 보면, 공판조서 속의 증인신문기록이 자신의 진술 내용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피의자도 가끔 있다.

이런 사정으로 위증죄를 무고죄처럼 다루기는 어렵다. 그래서 형법에서도 위증죄의 법정형이 무고죄보다 가벼운 징역형과 벌금형으로 규정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하여튼 무고와 위증죄에 대한 나의 증오심은 어려서부터 이토록 깊었다.

위증의 죄는 재판과정에서 생기는 범죄이므로 증인의 위증이 분명하다면 검사는 즉시 위증한 사람의 범죄를 밝혀야 할 것이다. 무고의 죄는 고소·고발사건의 수사 중 상대방을 처벌받게 하기 위한 허위의 고소나 고발로 판명되는 것이므로 이 역시 검사가 그 피의사실을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처분하면서 무고의 혐의를 밝혀 이를 처벌해야 함이 당연하다.

수사 또는 공판 검사가 위증이나 무고의 혐의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지나쳐 버린 사건을 특별수사부에서 찾아내 범죄를 인지하여 처벌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수사나 공판 검사가 눈감고 지나쳐 버린 옛날 사건을 다시 들추어 무고나 위증의 혐의가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사실 김빠진 맥주를 마시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당시의 세태는 이렇게 간단한 이유만으로 이를 무시해 버릴 사정이 아니었다.

형사부 소속 모든 검사가 고소 고발 사건에 매달려 귀중한 세월을 보내야 했으며,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진 후 기소된 많은 사건이 공판 과정에서 진실이 왜곡됨으로써 무죄가 되는 사건이 빈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형사사법 정의가 훼손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귀중한 공권력과 국가 예산이 낭비되는 엄청난 부조리가 아닐 수 없다.

수사 또는 공판 검사들이 이런 범죄의 혐의를 밝혀내 그때그때 응분의 처벌을 했으면 좋으련만, 워낙 바쁜 일정에 쫓겨서 이를 문제 삼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므로 어느 지방검찰청 할 것 없이 고소·고발의 대표 선수가 있어서 제 뜻에 맞지 않으면 즉석에서 고소장이나 진정서를 써서 제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중에 조사해 보고 안 일이지만, 단기간에 100여 회가 넘는 고소장과 진정서를 제출한 사람까지 발견되었다.


이런 풍조를 바로잡기 위해 우선 무고사범의 단속을 검사들에게 지시하면서 힘들더라도 이 수사를 한번 해 보자 제의하였다. 검사들이 이런 나의 제의에 쉽게 동의해줄 리가 없었다. 이 일은 이미 종결된 사건을 새로 들추어내는 것이므로 우선 폐기되기 직전의 수십 건 또는 수백 건의 사건 기록들을 찾아내 그 범죄 혐의 유무를 다시 가려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의 이런 지시에 따라 각 검사실에 여러 번 고소·진정을 반복하였던 사람들을 찾아내 그 사람들에 관계된 케케묵은 사건 기록이 배당되었다.

특수3부 소속 검사들이 범죄 정보의 수집을 위해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 들어앉아 냄새나는 폐기 직전의 기록만을 살펴보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검사들의 이런 끈질긴 노력으로 이미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버렸던 무고사범이 속속 밝혀지기 시작하여 나의 특수부장 재직 시절인 1983년 말까지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단속으로 무고사범은 13명을 구속하고, 9명이 불구속 기소되었으며, 위증사범은 20명을 구속하고, 6명을 불구속으로 기소하였다. 나의 착상 자체가 극히 황당한 것이었으나 소속 검사들의 집념에 찬 노력으로 이런 많은 사례를 찾아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지검 본·지청은 물론, 전국에 걸쳐 무고와 위증사범의 철저한 단속이 이루어지게 된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노력이 오늘날 우리나라 형사사법 정의의 구현에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검사와 법관을 수없이 괴롭히며 진상을 호도함으로써 무고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거나, 죄 있는 자가 무죄로 방면되는 이 무고와 위증의 죄가 발생되지 않아야 한다는 명제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런 기획수사를 매듭지은 다음 법조 출입 기자들에게 보도 자료를 만들어 배포하였더니 기자실이 시끄러웠다. 이 사건의 주임 검사의 표시가 없어서 기사 작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보도 관행을 보면 “서울지검 특별수사 제3부 ○○○ 검사는”이란 글자를 문장의 주어(主語)로 기사를 썼다. 부장검사가 공소장에 서명한 기소 검사가 아니므로 주어는 수사와 기소를 담당한 검사 개인임이 분명하다. 이 기사는 잘못된 게 없고, 오히려 정확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고 위증사범의 단속과 같은 기획수사는 특별수사부 소속 모든 검사가 참여하여 벌인 수사였다. 사건의 기소 검사도 모두 달라서 한 사람이 몇 건씩 수사하여 기소했던 범죄의 단속이었으므로 검사 한 사람의 이름을 내세울 수는 없다. 그렇다고 소속 검사 전원의 이름을 쓸 수도 없을 것이다.

한 글자라도 덜 쓰는 문장이 옳다고 여기는 기자들이 그 많은 검사들의 이름을 다 쓰려 하겠는가?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임 검사의 이름을 대 달라는 것이 그들의 주문이었다. 그러나 내 대답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랐다. “이 사건은 주임 검사가 따로 없다. 여러 명이 합심해서 벌인 수사이므로 그들의 이름을 다 쓰든지, 아니면 특별수사 제3부라고만 쓰든지, 알아서 하라.”

그들은 “이것은 안 된다. 왜냐하면 수사의 책임자를 명시해야만 그 책임 소재가 분명하므로 이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이 그럴듯하여 “그렇다면 수사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부장검사인 나이므로 다음과 같이 써라. 즉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 제3부(부장검사 송종의)’ 이것이 기사의 주어(主語)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법조 출입기자들의 기사는 내가 바라던 방향으로 변해 갔다. 내가 이런 결과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아 그렇게 유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특별수사라는 것이 단발 사건의 경우에는 검사 한 사람의 이름을 표시해도 별로 할 말이 없으나, 그런 사건에도 공소장에 이름이 남는 검사 이외에 다른 검사가 힘을 합쳐 수사하는 경우가 많다. 검사들뿐만이 아니다. 여러 명의 수사과 수사관들이 참여하여 벌이는 수사가 대부분이다. 검사 한 사람만의 이름을 들먹일 일이 아니다.

검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일이다. 특별수사부 검사로 발탁되기를 바라는 검사들은 알게 모르게 대부분이 이런 욕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 재미를 붙여 특종 기사를 흘려서 이름 한번 내보려는 헛된 욕심을 지닌 검사가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게다가 함께 고생한 검사들이 섭섭히 여길 여지도 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나는 내 고집대로 밀어붙였다.

법조 기자들이 이 사건 이후에는 ‘서울지검 특수3부(송종의 부장검사)는’이란 표현을 써서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각 언론사 데스크에도 내 취지를 설명하여 뜻을 관철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보도기관의 관행이 바뀌었다. 특수부에서 발표하는 보도 자료에는 사건의 대소를 막론하고 주임 검사의 이름 없이 오직 ‘특별수사 제○부’라는 내용의 기사가 송출된 역사적인 내력이 위와 같다. 요즘의 검찰 기사를 보면 특수부의 명칭이나 소속 지방검찰청의 이름조차 생략된 채 ‘검찰은’이란 주어 표시만 있는 기사도 많다. 검찰총장이 책임지라는 뜻에서 그런 표현을 했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

 

대통령특별지시로 ‘호텔 민원’ 수사 착수
공무원들 직·간접 빌미로 경영인 괴롭혀

내사 지시받은 정보기관원도 관련 밝혀
모두 보고하면 뒤처리가 더 어려워져

유형별 시차 두고 기소, 관련기관 통보


제5공화국 정통성 시비로 혼란한 시기

‘대학입시부정’ 본격 수사 전 상부에 보고
“지금 수사 발표하면 혼란 가중” 신중론에

내사 종결로 하되 개선책 촉구하기로 결론
YS정부 때 입시부정 대대적 수사로 성과


다음 다른 한 가지의 기획수사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이 사건은 나의 특수 제1부장 재임 시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서울지방검찰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두 곳의 호텔에 관한 수사 내용이다. 이 사건은 그야말로 대통령의 특별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특명 수사이다.


당시 대통령에게 직접 말을 할 만한 처지에 있었던 호텔 경영자가 있었다. 강남 지역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사람이었는데, 호텔을 경영하다 보니 여러 직종의 공무원으로부터 너무나 빈번한 상납 요구에 시달려 도저히 호텔을 경영할 수 없으니 이 부조리를 없애 달라고 탄원했던 모양이다.

이 말을 들은 대통령은 즉시 군 정보기관장에게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확인해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 기관장은 어떤 뚜렷한 부조리를 찾을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그 호텔 경영자가 다시 똑같은 내용의 탄원을 하므로 이번에는 군이 아닌 국가안전기획부에 그 진상을 규명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


그 지시에 따라 안기부에서는 국장 1명을 그 호텔에 투숙시키며 진상을 파악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당사자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하여 역시 뚜렷한 비위를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위 탄원인이 그 부당하고 형식적인 조사 내용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대통령에게 다시 탄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세 번째로 이런 부조리의 진상을 검찰이 규명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즉시 하달되었다. 당시의 대통령이 검찰을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알게 하는 사정이 아닐 수 없다. 국가 최고의 수사기관인 검찰이 대통령에게는 세 번째로 신임받을 정도의 국가기관이었던 것이다. 다만 위 제보자를 조사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이런 사건이야말로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에서 해결해야 할 사건이다. 어느 정도의 부조리는 예측할 수 있는 내용이었으므로 특수1·3부가 각부별로 또는 연석회의를 열면서 이 사건 부조리를 수사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무작정 수사를 벌일 일이 아니었으므로 수사 대상을 강북과 강남의 호텔 한 개씩으로 정하여 본격적인 내사에 착수하였다. 내사를 진행하면서 어느 정도의 비위 사실이 드러난 강북의 호텔은 특수3부에 맡기고, 속칭 ‘맨땅에 헤딩’하는 강남의 한 호텔은 특수1부가 맡기로 사건을 분담했다.


이 호텔이 수사 대상으로 된 이유는 제보자가 경영하는 호텔의 인근 호텔로서 서로 사정이 비슷할 것으로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범죄 단서를 찾아낸 다음 특수1부와 3부가 디데이를 정하여 일제히 수사에 착수하였다. 관계자들을 소환하여 조사하면서 증거를 수집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이 호텔이란 곳은 3차 산업의 종합 메카라고 할 수 있는 사업장이므로 그 운영과 아무런 관계없는 관공서가 별로 없었다, 시청, 구청, 경찰서, 소방서 등 관할행정기관은 물론 국세청, 관세청, 경찰 및 정보기관 등 여러 부처 공무원들이 직·간접적으로 그 사업에 관한 빌미를 잡아 드나들면서 괴롭힌 것이 드러났다.


경찰만 하더라도 보안, 정보, 수사, 교통 및 파출소 등 거의 모든 부서가 그 호텔 업무의 연관성을 내세워 드나들면서 괴롭히고 있었음은 물론, 산업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까지도 대출과 관련한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으며, 대통령이 내사를 지시하였던 두 곳의 정보기관원들까지 이 호텔을 제집 드나들듯 하면서 각종 명목으로 편의를 제공받고 있었음을 밝혀냈다.


사정이 이러하니 군 정보당국과 국가안전기획부조차 이런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을 규명해 놓고 보니 드디어 큰일이 생겼다. 수십 명이나 되는 많은 공무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가 큰 고민거리가 된 것이다.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라는 대통령의 특명이 있었으므로 이를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내용을 모두 보고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지가 문제였다. 나는 수사 결과를 그대로 밝히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하였다.


얼마 뒤, 대검의 고위 간부와 내가 청와대의 요청에 따라 담당 수석비서관을 방문하였다.


검찰의 상세한 수사 결과를 들은 그는 말 그대로 안절부절이었다. “이런 엄청난 내용을 내가 어떻게 각하께 보고드릴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그가 뱉어 낸 푸념이었다. 이미 두 번씩이나 별다른 비리를 찾지 못했다는 내용을 보고했던 그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동석하여 있었으므로 이런 내용까지 글로 남길 수 있다. 그 수석비서관은 자기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검찰에서 좋은 방법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대통령께 어떤 내용으로 보고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이후 상부에서 나에게 보고서를 다시 작성해 오라는 부당한 지시는 없었다.


그러나 이 호텔 사건을 모두 한 개의 사건으로 만들어 공소를 제기한다면 이제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임이 분명했다. 궁리 끝에 이 사건을 여러 개로 쪼개어 각 유형별로 범정이 중한 사람 몇 명을 대표자로 골라 여러 개의 사건으로 만들어 시차를 두고 기소했다. 나머지 경미한 사람들에 대하여는 모두 소속기관이나 관계기관에 통보하여 소리 없이 끝내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사건들에 관하여 서울지방검찰의 역사에 무슨 기록이 남게 된다면 사정은 어떻든 간에 이런 단발적 성격을 가진 몇 개의 사건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기 전에 찾아보았던 『서울지방검찰사』의 내용도 그와 같았다.


오늘날의 호텔 경영자가 어떤 고충을 겪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호텔이란 곳이 이렇게 많은 관련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의 간섭을 받으며 경영되는 사업장인 것만은 그 사업의 성질상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나의 특수부장 시절 범죄의 혐의를 밝혀냈으나 이를 사건화하지 못한 두 개의 사건이 있다.


첫 번째는 대학 입시 부정 사건이다. 특수부 소속의 한두 검사가 대학 입시의 부정 혐의를 내사하여 보고하므로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교육 입시제도의 문제점을 밝혀내 교육 풍토를 쇄신하고 싶었던 것이 나의 소박한 욕심이었으므로 내사를 계속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결과 상당한 내용의 입시 부정에 관한 사건 정보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수사를 벌인 것이 아니었으나 이미 상당한 범죄 정보가 축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국민 중 학부모가 아닌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이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진다면 온 나라가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당시의 제5공화국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정권의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 각종 반정부 세력의 정권 규탄 움직임이 격화되기 시작한 때였다. 내가 특수부장으로 부임하기 전, 1981년 10월에 저질 연탄 사건을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수사함으로써 정권에 크나큰 부담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검찰 수뇌가 문책당하는 사태가 야기된 것도 이러한 세태가 빚어낸 결과라 할 것이다.

특수부만의 노력으로 이 대학 입시 부정 사건의 전모를 파헤쳐 낱낱이 그 비리를 규명하는 것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수사 도중에 야기될 여러 가지 문제점이 예상되었으므로 상부에 이 입시 부정의 내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이 사건 수사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보고받았던 검사장은 좀 더 신중히 생각해 보자는 태도였다.

얼마 후 검사장실에 불려 간 나는 검사장의 다음과 같은 지시를 들었다. 나의 사전 보고 내용에 따라 검찰총수에게 보고한 결과를 알려 주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의 수사로 교육계의 비리가 밝혀진다면 검사로서는 보람된 일이기는 하나, 이 수사로 인하여 초래될 후유증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섭섭하기는 하겠으나 이 사건은 내사로서 종결하되 이미 드러난 구조적인 문제점을 교육 당국에 통보하여 자체적으로 개선책을 마련하도록 촉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상당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취지였다.

이 결론에 대하여 내가 불만을 느낀 것은 지금까지도 없다. 수사만이 능사가 아니라 제도 개선책을 마련하여 행정 당국 스스로가 그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토록 촉구하는 것도 검찰의 역할인 동시에 모든 사건의 수사는 궁극적으로 국가 발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있은 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나는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장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서울지검 형사 제3부에서 대학 입시 부정 사건을 대대적으로 수사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정권이야말로 대통령 직선제로 선출된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였으므로 정권의 정통성 시비나 정권 자체에 어떤 부담을 줄 가능성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이 달라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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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길수 전 법제처장
(무고·위증 기획수사 당시 3차장 검사)

 

두 번째는 법원 직원의 비리 사건이다.


법조 비리의 단속은 특별수사부의 단골 메뉴라 할 만한 사건 수사이다. 법조 주변과 법조 브로커의 단속은 수시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나의 특수3부장 재직 시인 1983년 1월 31일 일제 단속 결과 32명 구속, 2명 불구속 및 변호사 10명의 징계 상신이 있었고, 특수1부장 시절인 1983년 12월 16일 일제 단속으로 브로커 24명을 구속하고 변호사 6명을 불구속으로 기소한 사실만 보더라도 이 사건 수사가 특수부의 전담 수사 영역임을 알게 한다.

요즈음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당시 법조 주변의 부조리가 횡행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특수부에는 이런 법조 비리에 관하여 축적된 자료가 상당히 많았다. 이런 사범의 단속을 하다 보면 법원 공무원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내용이 더러 드러나기도 했다.

때마침 브로커를 단속하면서 입수한 자료가 여러 건 있었는데, 여기에서 법원 직원의 비리가 상당히 많이 발견되었다. 압수된 어떤 자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자료에 나타난 법원 직원의 비리 혐의가 너무도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 자료와 함께 그간에 입수되었던 자료를 취합하여 정리하여 보니 법원 일반직 직원 중 몇 명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직원이 급행료 또는 사건 편의 제공 명목의 금품을 관행적으로 받아 오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법원의 어떤 특정 업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법원에서 처리되는 사무 전반에 관한 것이라 해도 될 만한 비리였다. 개중에는 상당한 대가성이 있다고 볼 만한 큰돈이 거래된 사실도 있어서 이런 몇 개의 사건만이라도 수사를 벌인다면 큰 파문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우리 검찰은 오래전에 판사에 대한 구속영장의 청구로 사법파동이 초래되었던 불행한 경험이 있었다. 이 사건을 수사하다 보면 법관 몇 사람이 반드시 검찰에 출두해야 하는 사태가 예견되었다.

나의 지시에 따라 충실하게 자료를 취합 정리하여 내사 자료를 보고한 검사의 의견을 물었다. 이 사건의 수사가 진행된다면 반드시 몇 명의 법관을 소환하여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들도 비위에 관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잘못하다가는 80년대에 들어와 제2차 사법파동이 야기될 위험이 예견되었다.


이런 구체적인 내용에 관한 나의 보고를 받은 검사장의 심정은 또 어떠했겠는가?


한 이틀 지났을까? 검사장실에 불려 간 내가 들은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송 부장은 참 불행한 시절의 특수부장이요. 우리 검찰이 이 수사를 벌인다면 중도에 주저앉을 수도 있는 일이고, 수사하다 보면 전번 사법파동과 비슷한 사태가 또 벌어질 게 아니겠소?” 검사장의 말은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이리하여 그때까지의 내사 결과와 모든 자료를 근거로 법원 직원 수십 명의 인적 사항과 비리 내용을 정리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인편으로 극비리에 대법원장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그 뒤 법원에서 어떤 후속 조치가 이루어졌는지 그 결과는 내가 알지 못한다.


이 특별수사부장 시절 나의 본연의 업무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으나 보람된 것이었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를 적어 둔다.

첫 번째는 경찰 수사 간부의 특별교육과정에서 이루어진 나의 특강이다.


당시의 경찰 총수는 내무부의 치안본부장 K 씨로서 나의 대구지점 초임 검사 시절 관하 일선 경찰서의 수사과장직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나는 대구지검에서 차장검사 지시 사항 이외에 사법경찰관 교양 자료의 책자도 만드는 전담검사였으므로 관할경찰서에 대한 유치장 감찰 등의 기회에 사법경찰관 교양 자료를 근거로 사법경찰관을 지도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인 바 있었다. 이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그 치안본부장이 내게 위 간부들의 수사 교육과정에 특강 시간을 마련해 놓았으니 와서 강의해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다.

나는 서울지검 검사 시절 경찰의 수사권 독립 움직임 때문에 큰 고생을 한 바 있었으므로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다만 한두 시간의 강의로는 부족하니 최소한 다섯 번 이상의 특강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배려하여야 한다고 주문하고, 강의의 제목을 특정해서는 안 되며, 말 그대로 특강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치안본부장의 특별 지시에 따라 수사 간부 특별교육과정에 6번의 특강 시간이 내게 배정되었다.

내가 이런 제의를 하고 그 교육과정에 참가하여 특강을 하게 된 것은 앞으로 또 재연될지 모르는 경찰의 수사권 독립 움직임을 미리 방지하고자 하는 뜻 이외에, 일선 경찰의 수사 현실과 애로 사항을 소상히 파악하여 검찰에 전파함으로써 검경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면서 검사로서 적절히 사법경찰 관리를 지휘하여 형사소송법 본연의 취지를 살리고자 하는 소망 때문이었다.


나는 법무연수원 파견 근무 시절, 강사의 결강이 있을 때마다 교육과정에 참가한 검사들에게 특강은 아니었으나 정담 비슷한 형태로 그 시간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대화한 많은 경험이 있었으므로 이런 교육과정에 특강을 하는 강사로서의 두려움은 조금도 없었다.

내 직책이 서울지방검찰청의 특별수사부장이었고, 또 몇 년의 특별수사 경험도 축적하였던 때였으므로 경찰 간부들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면서 대화하고 싶었다. 수강생이었던 경찰 간부들은 전국에서 수사 실무를 담당하거나, 앞으로 수사 간부가 될 사람들이었으므로 이는 결국 보람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내 직책 이름 때문이었던지, 수강생 모두가 진지한 태도로 나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나의 일상적인 말로만 끝나는 강의가 아니라 검사와 사법경찰관 사이의 진지한 의견 교환과 토의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방법의 특강이 이어졌다.

이 강의가 6번에 걸쳐 이어져 갔다. 많은 대화가 오간 것임은 그 시간이 말해주는 것이다. 말문이 열리기 시작한 경찰관들의 말에는 실로 경청할 만한 내용이 많았다. 내가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경찰이 검사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또 그들이 검사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소상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 또한 검사들이 경찰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었다.

내가 이 교육과정에 강사로 참여하여 느낀 소감과 함께 검찰이 경찰의 처지를 알고 지도하여야 할 많은 내용이 상부에 보고되어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 또는 대검 차장검사의 지시로 일선 검찰에 하달되었음은 물론이다.
먼 훗날 내가 대검찰청의 강력부장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이 교육과정을 이수하였던 여러 경찰 간부들이 본부와 일선 경찰의 요직에 기용되었으므로 나는 경찰의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6번이나 특강을 이어 간 나의 정력이 대단한 것으로 느껴진다.

다른 하나의 사례는 의사들에 대한 특강이었다.


나의 친한 친구 중 명의라고 할 만한 감염내과 분야의 권위자인 의사 한 사람이 있었다. 이미 몇 년 전에 작고하였는데, 의사들이 흔히 접해 보지 못한 희귀한 병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당시 나는 간간이 동양의학에 관한 책을 살피고 있었는데,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지은 명의 허준(許浚)에 관한 무슨 책이 발간되었는지, 아니면 어떤 드라마가 있었던지 분명치 않으나 항간에 허준에 관한 관심이 높아져 많은 이야기가 나돌던 시절이었다.

위 친구를 포함하여 몇 명과 대화를 나누던 중 나의 짧은 동양의학 지식을 자랑삼아 늘어놓았더니 의사들에게 그런 내용의 특강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의 요청이 매우 진지하였으므로 한번 해 보자며 수락했다.

고려대학교의 구로병원이 개원된 즈음인 듯하다. 그곳에서 경력이 짧은 의사들의 교육과정이 있었다. 내가 근무 시간 중 그 의사들에게 특강할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아침 일찍 시간을 잡아 달라고 요청하여 수십 명의 의사를 상대로 검사가 특강을 하는 엉뚱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의 둘째 형님이 의사였다. 이북에서 피난을 나오면서 제주도로 내려와 정착한 다음 그곳에서 개원하여 나중에 명의란 이름을 듣던 분이다. 내가 대학 휴학 중 제주도에 내려가 그 형님 댁에 기숙하며 몇 달 공부하면서 보니, 이분의 환자 다루는 방법이 매우 독특했다. 당시 제주도는 교통이 불편한 벽지였으므로 의약품이 제대로 조달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환자들이 찾아오면 중환자는 별수 없으나, 병증이 비교적 경미한 환자들에게는 그 병이 별것 아니라며 안심시킨 후, 조수에게 눈짓하면서 “그 약 지어 드려라.” 이렇게 끝내고 환자를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환자들은 대부분 며칠 뒤 병이 다 낫다고 하며 생선 등 지방 특산물을 병원으로 들고 와 놓고 가는 것이었다. ‘그 약’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환자들이 의사를 명의라고 하며 사례를 한다고 찾아오는지 궁금해서 형님께 그 약이 무엇인가 물어보았다.

이 형님이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이 제주도에, 그것도 제주시가 아닌 남제주군의 효돈이란 동네에 무슨 쓸 만한 좋은 약이 있겠니? 사람의 병은 웬만한 것은 저절로 치유되기 마련인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환자 자신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선 환자를 안심시켜 기분 좋게 만들고, 또 약까지 지어 준다면 대부분 병은 저절로 낫는다.


쓸 만한 약이 없으니 아스피린 한 알 넣고, 밀가루를 섞어서 약을 지어 주면 그 약이 특효약인 것으로 알고 있는 환자가 그렇게 믿고 그 약을 먹을 테니 대부분 병이 낫게 된다.”


『자허원군성유심문』 첫 구절인 5언 4구 중 마지막 다섯 자 ‘명생어화창(命生於和暢)’, 즉 밝고 즐거운 가운데 생명이 이어진다는 뜻의 말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내가 의사들에게 강의하기 전에 나를 소개하면서 의사의 동생이어서 의사의 고충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며 그들의 관심을 끈 다음, 위와 같은 내용의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내가 검사로서 다루어 왔던 여러 가지 사례를 들면서 의사가 의료과실을 범하여 벌어지는 법률상의 모든 과정과 결과를 곁들여 강의하면서 끝낸 나의 마지막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의사가 양방(洋方)만을 의술로 알고 여기에만 의지하면 절대로 명의가 될 수 없다. 문진(問診), 시진(視診), 촉진(觸診), 검진(檢診)의 과정을 거쳐 환자의 병을 진단한다고 해도, 약과 주사만이 능사가 아니라 환자의 심리 상태를 잘 살펴서 환자 스스로 자기의 병을 고칠 수 있도록 자생력을 키워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사람의 몸은 모양만이 사람일 뿐, 그 자체가 곧 소우주이다. 수천 년부터 이어진 한의학의 오묘한 이치를 잘 살펴서 사람의 몸을 자연의 이치에 맞게 다스려야만 명의가 될 수 있다. 한방의술을 경시하는 태도는 우선 명의가 되는 제1 요건이 결여된 것이다. 우리의 선현인 허준 선생의 일생을 참고하여 의사로서 대성하기 바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터무니없는 특강이었으나 내가 그들에게 한 말 중 『자허원군성유심문』의 첫 구절 5자의 의미는 그들도 잘 이해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엉뚱한 일이었기는 하나 전혀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런 황당한 내용을 내 삶의 기록에 남기는 것이다.


경찰 간부 수사 교육과정 특강 배정 받아
6회에 걸쳐 간부들과 진지하게 의견 나눠


경찰이 검사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소상히 알게 돼

훗날 ‘범죄와 전쟁’ 지휘 때 큰 도움


특수1부장실은 기자들의 왕래가 잦은 곳
부속실 직원이 신원 확인 후 출입 허용


하루는 검사장이 차 한잔하러 들렀다가
“누군데 사전연락 없이…” 직원 말에 돌아서
얼마 후 “부장이 그렇게 높은 줄 몰랐다”
 


이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를 적어 둔다. 특별수사 제1부장 시절의 이야기다.


서울 덕수궁 옆에 있던 당시의 검찰 종합청사는 15층 건물로서 정방형에 가까운 백색 타일 건물이었다. 그 청사가 신축된 후 이 건물은 대검찰청, 서울고등검찰청 및 서울지방검찰청의 모든 직원이 함께 근무하고 있는 검찰 종합청사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건물에는 검찰총장을 위시하여 검사장급 이상의 검찰 고위 간부가 10명 넘게 근무하고 있었다.

간부 전용 엘리베이터 옆에 ‘國家紀綱(국가기강)의 確立(확립)’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돌에 새겨져 걸려 있어서 사무실에 올라올 때마다 이 휘호석을 볼 수 있었다. 서울지검 특별수사부는 이 건물의 4층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특수 제3부장실은 서향으로, 특수 제1부장실은 북향으로 된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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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2월 4일 당시 이종남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주최로 역대 서울지검장 초청 간담회가 열렸다. 사진 앞 줄 왼쪽부터 오탁근, 김병화 김치열, 장재갑, 김형근, 최대교, 이태희, 이봉성, 당시 고인이 된 제3대 서정국 서울지검장의 부인, 김성재. 뒷줄 왼쪽부터 이종남 당시 서울지검장, 이명희 당시 대검 차장검사, 허형구, 서정각, 김일두, 강우영, 김석휘, 정해창, 서동권 당시 서울 고검장. 뒷줄 우측 다섯 번째가 송종의 당시 서울지검 특수1부장. 
<제공=천고법치문화재단>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은 이종남(李種南) 씨였다. 이분은 성품이 매우 소탈하고 특히 나를 각별히 총애하였으므로 내게는 검찰의 은인 같은 분이었다. 이분께서는 사석에서 나를 ‘여사머사 부장’이라 부르기도 했다. 내가 평안도 사투리를 섞어서 이야기하면서 ‘사정이 여사머사하다’라는 말을 자주 썼던지, 하여튼 나를 그렇게 부르는 때가 많았다.

검사장께서 점심 식사를 끝내고 6층의 검사장실에 가시기 전에 특수1부장실에서 차나 한잔하시려는 뜻으로 내 방을 찾아오셨던 모양이다. 검사장님께서 나의 부속실 직원에게 부장 계시냐고 물었다. 당시 나의 부속실에는 검찰직 주사보 한 명과 기능직 여직원 한 명이 근무하고 있던 때였다.

이 두 사람이 내 방을 찾아온 사람이 검사장인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누구신데 우리 부장님을 뵙겠다고 찾아오셨습니까?” 하고 질문했다. 뜻밖의 질문을 받은 검사장께서 놀라기도 했겠으나 다소 건방지다고 생각하였던지 다시 부장검사님 계시냐고 물었다.

 


부속실 두 직원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사전 연락도 없이 찾아와 부장검사님을 뵙겠다고 하십니까?” 다시 물었으니 사정이 난처해진 것이다. 다소 불쾌한 기분으로 돌아서는 검사장의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특수1부장실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찾아와 면회하겠다고 하는 한심한 사람 다 보겠다.”라는 내용이었다.

특수1부장실은 수많은 법조 출입 기자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방이었으므로 부속실 직원이 반드시 신원을 확인한 다음 나의 허락을 받아야 출입이 허용되는 게 당시의 실정이었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얼마 후 검사장님께서 찾으시기에 그 방에 들어갔더니 하시는 말씀이 걸작이었다.


“야! 여사머사 부장이 그렇게 높은 사람인 줄 내가 미처 몰랐다. 오늘 특수1부장실 앞에서 내가 큰 망신당하고 왔다.” 이런 말씀이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야 위와 같은 일이 있었음을 알았다. 서울지방검찰청의 직원이 소속 검사장의 얼굴도 모르는 가운데 근무하는 검찰 종합청사의 웃지 못할 실정의 한 단면이다.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먼 훗날 내가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장이 되었을 때, 취임식이 거행된 직후 본청의 전 직원과 산하 지청의 사무관급 이상 직원 모두의 신상 신고를 받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지게 된다.

나의 특수부장 재직 중 특별수사 제3부와 특별수사 제1부에서 함께 근무하였던 여러 검사들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하면서 그 성명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채방은(蔡方垠), 김각영(金珏泳), 김대웅(金大雄), 유제인(柳濟仁), 이범관(李範觀), 정홍원(鄭烘原), 김영진(金永珍), 윤종남(尹鍾南), 김성호(金成浩), 김상희(金相喜), 장창호(張昌浩), 강지원(姜智遠), 조창구(趙昌九) 등 13명이 그들이다. 이 검사들은 모두 검사장께서 나의 건의에 따라 특수부에 배치한 검사들이었다.

내가 전주지방검찰청 차장검사로 전보된 직후 위 13명의 연명으로 제작된 나의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 제3부장 및 제1부장 재직기념패가 내게 전달되었다.

나의 특수 제3부장 때의 특수 제1부장은 김도언(金道彦), 특수 제1부장 때의 특수 제3부장은 정성진(鄭城鎭) 두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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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셨던 검사장은 이창우(李彰雨), 이종남(李種南) 두 분이었으나 이창우 검사장은 7개월 정도 상사로 모셨고, 나머지 기간은 모두 이종남 검사장을 모시고 지낸 기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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