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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 전문 (7)

[송종의 회고록 전문 (7)]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2부 가필(加筆) ⑦ 이 글을 남겨도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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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의 세 가지 허물은, 조급(躁)·감춤(隱)·눈치 없음(?)


변호사법 전문 개정의 배경과 숨은 사연


법무부 법무실 법무과장

(1981. 4. 13. - 1982. 8. 15.)


오늘은 2015년 11월 13일 금요일이다. 아침 일찍 산에 오르는 때부터 시작된 가을비가 비답지 않게 추적추적 내리면서 하늘만 잔뜩 찌푸린 날씨이다. 워낙 가뭄이 심했으니 비다운 비가 흠뻑 내려 주었으면 좋으련만 이는 사람의 마음일 뿐, 하늘은 그 심정을 모르는 듯하다.

법무과장 시절의 글을 쓰려 하니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그때의 일이 아니라 『자허원군성유심문』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이다.

  

‘계안막간타비(戒眼莫看他非) 계구막담타단(戒口莫談他短)’.

 

눈을 경계하여 남의 잘못을 보지 말고, 입을 조심하여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라는 것이 자허원군의 가르침인 것을 나이 든 나는 지금도 강명 깊게 느끼고 있는 터이므로 이 글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지 매우 어렵다.

내가 이 글을 시작한 취지가 내 공직 생활 중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글로 남겨 뒷사람들에게 알려 두고자 하는 뜻 이외에, 혹시 이 글을 읽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한두 가지 교훈이 될 일이라도 써서 그들의 인생살이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게 하고자 함이었다.

이런 취지라면 마땅히 적어 두어야 할 일이로되, 이 글을 쓰다 보면 괴팍한 성품을 지녔던 어느 한 사람의 언행을 언급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참 딱한 노릇이다. 게다가 그분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작고하셨으므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경건한 글이 아니라 자칫하면 그의 단처만을 드러내는 글이 될 염려가 없지 않다.

 

그러나 내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글을 쓴다면 고인께서도 성품만이 괴팍하였을 뿐, 이를 이해하지 못할 옹졸한 위인이 아니었으므로 지하에서도 크게 노하지 아니할 것으로 믿는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은 마땅히 내가 적어 둔 내용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루 두 차례만 보고 받는 장관
퇴근 무렵 수정사항 지적한 후
“다음날 출근 때까지 완성” 지시
거의 야근 또는 밤새우기 일쑤
“과로로 검사가 요절” 소문도
 


장관 부임 뒤 실·국 장 회의서
생활 기본법의 불합리한 조문
1년 내 모두 개정 준비 지시에
그 자리에서 “안 되는 일” 지적
회의 뒤 ‘즉석면박’ 정중히 사과


법무부 법무실 법무과의 연혁을 살펴본다.

  

1948년 5월 31일에 개원한 제헌국회는 헌법 제정 작업과 병행하여 건국정부의 골격이 된 정부조직법을 성안하여 그해 7월 17일 제헌헌법의 공표와 동시에 법률 제1호로 11부 4처 3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부조직법을 제정·공포하였다.

이 법률에 따라 법무부가 출범하면서 산하 직제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는 작업을 진행하여 그해 11월 4일 대통령령 제21호로 법무부직제를 처음 제정·공포하였으며, 그 직제에 따른 법무부의 산하 기구는 1실 4국 21과였다.

 

그 직제에 따라 법무국에 법무과를 포함한 4개 과가 설치되었는데, 최초의 법무과는 법무행정의 종합기획, 호적, 등기, 수습법관 및 수습검찰관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고, 변호사와 공증인에 관한 사무를 따로 변호사과에서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 직제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정되고 조직이 확대되어 가면서 오늘에 이른 것인데, 정부 출범 당시의 명칭인 법무과라는 이름이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 동안 부서의 명칭이 변경되지 않은 채 최초 직제의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과는 법무부에 법무과뿐이다. 명칭 자체가 법무부 법무국 법무과였으니 법무행정을 종합적으로 관장하는 법무부의 주무 부서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법무부 법무실의 법무과장으로 발령받을 당시 법무과는 법무행정의 종합기획이란 기본적인 임무 이외에 법령안의 기초·심사, 법령의 유권해석, 변호사와 공증인에 관련된 사무 일체를 관장하면서 법무부의 다른 실·국의 업무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무를 처리하는 부서였다. 그 이후 1983년경에 법무실장 밑에 법무심의관실과 섭외법무심의관실이 설치되어 법무과의 과중한 업무 일부가 이관되었다.

오늘날의 법무실 직제를 보니, 옛날 법무과의 업무가 분화되어 형사사법시스템 운영단, 법무심의관, 법무과, 국제법무과, 통일법무과, 상사법무과, 법조인력과 등으로 과거 법무과에서 담당해 오던 업무가 이관되어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도록 직제가 개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모든 업무를 법무과라는 1개의 부서가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나의 법무과장 재직 당시 법무과의 검사 정원은 법무부 내의 각과 중 가장 많은 5명이었다.

나를 미운 오리 새끼처럼 여기던 법무 검찰의 인사권자는 나의 부임 20일 전쯤 그 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새로 부임한 장관의 대대적인 인사 발령으로 이 법무과장직에 승진 전보된 것이었다. 내가 검찰 제3과 검사로 근무하면서 법무과의 업무를 어깨 너머로 보아 왔으므로 대략 짐작은 하였으나 막상 그 직책을 맡고 보니 이 자리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부임 즉시 장관실에 불려 가 받은 지시 내용이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법무과 소속 검사 5명 중 특정한 검사 1인의 이름을 대면서 그 검사에게는 법무과의 통상적인 업무 처리를 맡기지 말고 그가 처리하는 모든 업무에 대하여도 일절 관여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그 검사는 장관의 개인적인 법률비서관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법무부로 데려오면서 나와 같은 날짜로 법무과 소속 검사로 발령을 해 둔 것이었다. 콩 볶듯 하면서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 써야 할 지경의 법무과에서 부서 본연의 업무를 처리하여야 할 검사는 5명이 아니라 4명에 불과했다.

그분께서 장관으로 부임하기 얼마 전에 그의 명의로 전문 법률 서적이 발간되었는데, 그 검사가 이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사후에 알게 되었다. 과연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훌륭한 검사였다. 장관의 지시에 따라 특명 사무만을 처리해야 했던 그 검사는 며칠 밤을 꼬박 지새우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거의 일상이 되다시피 했다.

날짜는 분명치 않으나 그 검사가 과로에 지쳐 사무실에서 졸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가 처리하는 일에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법률상으로는 엄연한 내 부하였으므로 상부에 보고할 겨를 없이 내가 직접 나서서 그를 급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이송하여 응급조치를 취한 후 입원시켰다.

이 와중에 장관께서 개별적으로 그 검사를 찾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병원에 입원한 사실을 알게 된 장관이 나를 호출하여 장관실에 불려 갔다. 입원하게 된 경위를 문의하기에 사정을 대강 설명하였다. 그런데 날아온 말이 나를 발끈하게 만들었다.

그 검사에 대하여는 과장이 일절 관여하지 말라고 이미 지시하였는데, 왜 사전에 보고도 없이 당신 마음대로 입원을 시킨 것이냐는 취지였다. 나는 정색을 하고 큰 소리로 고함치듯 말했다.

 

그 검사는 장관의 부하이기 이전에 법률상 나의 직속 부하 직원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사에 관한 일이 왜 장관에게 사전에 허가받을 결재 사항이냐는 취지였다. 그도 별말은 없었지만 매우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를 찾은 이유가 검사의 입원에 관한 건이었으므로 나는 두말없이 돌아서서 따가운 시선을 뒤로하고 장관실을 나왔다.

이즈음 장관과 법무부 간부 전원이 참석하는 법무부 내의 공식 행사장에서 또 다른 검사가 졸도하여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어느 실·국 할 것 없이 법무부의 직원 모두가 엄청난 과로와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일해 온 결과였다.

그분께서는 직무 수행 방법이 매우 독특하여 아침 출근 직후와 퇴근 때에 보고받고 결재를 하는 것이 통상적이었고, 낮에는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 퇴근 무렵 겨우 시간을 얻어 결재받다 보면 자료를 보완하거나 보고서의 내용을 수정하여 다시 보고해야 하는데, 그 시간을 반드시 다음 날 아침 출근 시로 지정해 주는 것이었다. 이 지시를 따르려면 대부분 밤늦게 야근하거나, 때로는 밤을 새우며 일해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저녁 퇴근 무렵 장관실을 다녀오는 과장의 입에서 무슨 지시가 있을지 매일 전전긍긍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장관이 지시하는 내용이 반드시 옳다고 여길 만한 것이 아닌 경우도 많았으므로 그 자리에서 중언부언하는 일은 가급적 삼가고, 검사들에게는 지시하지 않은 채 다음 날 적당히 보고하여 끝내야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많았다.

이분은 내가 검찰 제3과 검사로 근무하던 기간 중인 1977년 2월 17일에 법무부 차관으로 부임하여 보안처분심의위원회의 당연직 위원장이 되었으므로 내가 6개월 정도 상사로 모신 적이 있었다. 나의 신상과 직무 수행 능력에 대하여 그 나름의 판단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으나, 그가 공식 석상이라고 해도 될 만한 자리에서 나를 법무과장으로 발탁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본인이 교정국장 재직 시 서울지검의 체육대회가 서울소년원에서 있었다. 그 소년원 마당에 철봉과 평행봉 등의 운동시설이 있었는데, 그때 그 철봉과 평행봉에 다가가 운동하는 검사가 있어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자신도 학창 시절 기계체조에 관심이 많았던 때문이다. 그 검사의 기계체조 동작을 보니 상당한 수준임을 알 수 있었다. 그 검사가 바로 송 과장인데, 이 사람은 그 실력에 미루어 보면 법무과장을 시켜도 큰 병 없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 법무과장으로 발탁하였다.” 이런 취지였다.

능력보다도 체력을 참작하여 일을 시킬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면 운동선수를 뽑아 법무과장을 시켜야 할 것 아닌가? 법무과의 역대 과장 중 과로로 인하여 젊은 나이에 요절한 선배가 있었다고 듣고 있었던 터였다. 『법무부사』를 자세히 살펴보아도 위 사실은 나타나 있지 않으나 그 선배의 재임 기간으로 표시된 마지막 날에는 어떤 인사이동도 없었고, 그 재임 기간 이후 상당 기간 후임 법무과장이 임명되지 못한 채 공석으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분의 장관 취임 후의 포부와 젊은 검사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 장관이 주재하고 차관이 배석하는 정례 실·국장회의가 있었다. 그가 장관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이 실·국장회의에는 법무부의 주무과장인 법무과장을 배석시키는 때가 많았다. 각 실·국의 직제순으로 보고가 이루어지니 기획관리실장 다음으로 법무실장의 보고가 있었을 것이다. 그 보고가 끝난 즉시 장관은 다음과 같이 법무실장에게 지시하였다.

 

“요즘 세상이 급격히 변하고 있는데, 우리의 법률은 이를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국민 생활의 기본법인 민법, 상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이 모두 이런 처지에 있다. 그러므로 기본법의 개정이 필수적이다. 법무실에서는 조속히 이 기본법의 개정 계획을 수립하여 적어도 1년 이내에는 이 기본법의 불합리한 조문을 모두 개정하는 작업을 끝마치도록 하라.”

이 무렵 민법의 호주제도 존치 여부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삼남의 유림 선비들이 심심치 않게 법무부를 찾아와 붓으로 쓴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관계관의 면담을 신청해 오던 때였다. 이 말을 들은 법무실장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겠는가? 장관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나는 서슴없이 내 의견을 개진하였다.

 

“인근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개정형법가안 하나를 가지고 수십 년간 논쟁을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1개의 조문도 고치지 못했는데, 국민 생활의 기본법 모두를 무슨 재주로 1년에 다 개정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안 되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니 장관의 입장이 어떻게 되었을까? 안색이 급히 변하면서 “오늘 회의는 더 계속할 필요가 없으니 끝냅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일어서서 장관실에 달린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참석한 실·국장 모두가 벌레 씹은 얼굴이 되어 장관실을 나갔음은 물론이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장관의 호출이 있었다. 장관실에 들어가니 그는 집무실의 책상에 정좌하여 매서운 눈초리로 내게 질문하였다. 아침 회의 시 나의 지시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이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다음과 같은 내용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기본법의 개정 논의는 정부 수립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우선 어느 한 가지 법이라도 개정하려면 그간에 이루어진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축적하여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과거의 법 개정 선례를 참작하여 검토함은 물론, 그 분야의 전문가를 구성원으로 개정심의위원회를 발족시켜야 한다. 사계의 전문가들이 수십 차례에 걸쳐 회의를 진행하면서 의견을 집약한 다음 관계기관과 국민의 뜻을 적절히 여과하여야 한다.

 

개정 작업을 법무부가 주관하더라도 법원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하므로 법원에서도 법무부와 보조를 맞추어 이 개정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진행하면서 공청회 등의 형식적 절차를 거쳐야 함이 필수적이다.

 

개정안이 마련되면 당정 협의 등 적절한 방법으로 정치권과의 협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이 과정이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더라도 입법 예고 이후에 예측되는 모든 사태에 대비하여 기본법의 개정은 점진적·장기적으로 추진되어야 함이 당연하다.

 

한 개의 법률 개정이 이러할진대, 한 개도 아닌 다섯 개의 기본법 모두의 개정 계획을 법무부 법무실만의 힘으로 수립한다는 것 자체가 실현 가능성이 없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렇게 5개나 되는 기본법령을 단기간에 한꺼번에 손질한 유례가 없다.” 이러니 못한다고 한 것이라는 취지로 답변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한 말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사정이 그렇다면 내가 설령 부당한 지시를 했다 하더라도 즉석에서 그것은 안 된다고 하면서 면박을 줄 일이 아니라, 그때는 모른 체하고 듣고 난 다음 적당한 기회에 나에게 이런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해 주면 내가 차관, 실·국장들 앞에서 면박당하는 일이 없지 않겠는가?” 듣고 보니 과연 옳은 말이었다. 나는 즉시 나의 경솔한 언동에 대해 장관께 정중히 사과했다.

 

언젠가 내가 『논어(論語)』의 「계씨(季氏)」 편을 읽다가 삼건(三愆)의 장(章)에서 눈이 멎었다. 위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군자를 모심에 세 가지 잘못이 있다. 말씀이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말하는 것을 조급함이라 한다. 말씀이 이르렀는데 말하지 않는 것을 감춤이라 한다. 안색을 살피지 않고 말하는 것을 눈이 멀었다고 한다[孔子曰: 侍於君子有三愆, 言未及之而言, 謂之躁, 言及之而不言, 謂之隱, 未見顔色而言 謂之瞽].”

 

안 해야 할 말을 하고, 해야 할 말은 안 하며, 눈치 없이 아무 때나 말하는 것이 아랫사람의 세 가지 허물이란 뜻이다. 물론 이때에 윗사람이 덕이 아닌 위세로 아랫사람의 입을 막아 꾸짖는 것은 그의 잘못일 것이다.

 

내가 저지른 위와 같은 일을 공자의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기본법의 개정 문제는 이렇게 끝났고, 그의 재임 기간 중 어느 기본법의 어느 한 개 조문도 개정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간 중 이루어진 한 개의 법률 제정과 다른 한 개의 법률 개정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므로 이를 알려 두고자 한다.

제정된 법률은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이다. 이 법은 1981년 12월 31일 법률 제3490호로 제정·공포된 법률이다. 내무부와 법무부의 공동 제안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 법률의 내용과 조문은 모두 법무부에서 성안한 것이었다.

이 특별법은 종래 업무상과실치상 또는 중과실치상으로 다루어 오던 교통사고 운전자에 대한 형사 처벌의 특례를 허용하여 그 운전자가 신호위반, 중앙선 침범 등 8가지 유형의 중대 사유에 해당되지 않을 때, 사고 차량이 공제조합 또는 종합보험에 가입하였거나 피해자가 운전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을 경우 공소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법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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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현대자동차 미국수출 <제공=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이 법의 입법 취지는 1980년대에 들어와 자동차의 운전이 국민 생활에 보편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 부응하여 교통사고로 인한 피해의 신속한 회복을 촉진하고 국민 생활의 편익을 증진하려는 것이었다.

 

이 법이 제정된 것은 내가 법무과장으로 부임했던 그해 말이었다. 이 법은 장관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공부 측의 협조 요청이 그 시발점이 되어 법률로서 성안된 것이다.

그해 어느 날 상공부의 기계공업국장이 나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대학 동기생으로서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줄곧 상공부에 근무하면서 그때 이미 국장 자리에 있었는데, 뒷날 두 번씩이나 상공부 장관을 역임한 사람이었다.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정부의 중화학공업육성 정책에 따라 우리나라의 기계공업을 육성·발전시켜야 하는데 이 기계공업의 집약체가 곧 자동차이다. 자동차 제조에는 수많은 기계부품이 들어가게 마련이므로 이 자동차공업이 육성되면 연관 산업에 파급 효과가 매우 커서 자연적으로 기계공업이 육성·발전될 수 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이미 승용차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현 단계에서 이를 수출할 수는 없고 내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교통사고가 나면 운전자가 처벌받는 경우가 많아서 자가 운전을 현재로서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자가운전자가 많이 생겨나 이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오너 드라이브(Owner drive) 시대가 되어야 비로소 자동차공업이 육성·발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운전자가 경미한 사고를 내더라도 피해자와 합의하였거나 그 자동차가 보험 또는 공제조합에 가입되어 있다면 처벌을 면제해 주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자가운전자가 늘어나 자동차의 구매수요가 많아질 것이니 이 취지를 이해하고 여기에 합당한 법률을 마련해 달라는 취지였다.

 

나는 이미 2년 전부터 국산 자가용 자동차를 직접 몰고 다니던 처지였으므로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여 그런 법을 한번 만들어 보고자 했던 것이다. 먼저 상부에 위의 면담 내용을 보고한 다음, 내무부와 재무부 등 관계 부처와의 협의를 지시하였다. 이 법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합의와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보험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편, 일선 검·경의 의견을 들어야 했다. 몇 개의 예외 사유를 두었다 하더라도 경미한 교통사고는 모두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처분해야 하니, 이에 대한 일선 검사들의 의견을 들어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검을 통해 의견을 수렴해 본 결과, 과연 이 법이 제정될 수 있을지 상당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검사의 공소권을 제한하는 것이 법의 내용이므로 이에 대한 검사들의 반대 의견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망한 사례를 예외로 하더라도 큰 상해를 입은 중상자가 발생된 교통사고까지 이 법의 면책조항에 걸려 공소를 제기할 수 없으므로 그 당시의 법률 감정으로서는 쉽게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인명 경시 풍조가 크게 만연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수십 년간 업무상과실치상죄의 처벌에 익숙하였던 검사들의 사고를 전환시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법이 제정되려면 이 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운전자의 과실 내용을 제대로 가려내어 이를 조문화함으로써 검사들의 법률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급선무였다.

이리하여 8가지 유형의 운전자 과실을 규정하게 되었다. 이 8가지 과실은 내가 직접 가려내 법조문에 명시한 것이다. 외국의 법제를 조사해 보아도 이에 참고할 만한 마땅한 법제가 없었다. 이리하여 나는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면서 이 8가지의 예외 사유를 찾아내 법조문에 명시했다.

 

일선 검·경의 의구심을 잠재우고 이 법이 제정되기까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몇 달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이 특례법이 탄생했다. 내가 운전면허를 취득한 사실과 자동차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하여 1개월간 자동차의 정비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실이 뒷받침되어 비로소 이 법이 제대로 법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제정된 것이다.

이 법의 제정·시행으로 더 많은 교통사고 피해자가 생기고, 인명 경시 풍조가 더 확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자가 운전이 늘어나면서 자동차공업이 육성·발전됨으로써 오늘날 우리나라가 자동차 제조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게 된 데에는 이 법의 시행이 계기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자동차 보험제도가 확충된 것은 이 법의 시행 전에 재무당국에서 그 보험을 내실화하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 나의 재임 기간 중 나의 손으로 성안된 이 법률은 그런 뜻깊은 의미를 가진 법률이라고 생각한다. 이 법의 제정에 매달려 몇 달간이나 고생하였던 유명건(柳明建) 검사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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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현 전 법무실장 / 유명건 검사


다음은 변호사법의 개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내가 법무과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장관의 특명으로 변호사법 개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변호사와 공증인의 사무가 법무과의 기본 업무이므로 이 변호사법의 개정은 당연히 법무과의 소관 사무이다.

제5공화국이 출범한 직후인 1981년부터 사법시험 합격자를 매년 300명씩 선발함으로써 변호사의 수가 대폭 증가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현대의 고도산업사회에 맞는 법무 수요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절실했던 것이다.

당시의 현실을 보면, 변호사의 업무 영역이 전문화되지 못한 채 변호사 한 사람이 각종 민·형사 사건을 수임하여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몇 명의 변호사들이 모여 같은 사무실을 쓰면서 합동으로 개업하는 일이 더러 있었으나, 이는 간이 절차에 의한 민사분쟁사건 처리특례법에 따라 공증사무를 처리할 수 있는 혜택을 받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시대 상황의 변화에 부응할 수 있도록 고도산업사회에 맞는 변호사제도를 확립해야 할 시대적 요청이 생긴 것이다.

변호사 1인이 만능 스포츠맨처럼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도록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관은 변호사 업계의 당시 상황을 “일성일주풍조(一城一主風潮)”라고 표현하였는데 아주 적절한 지적이었다. 또한 변호사단체가 그 이름에 맞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법무부의 감독 권한을 축소하여 그 단체의 자율성을 함양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런 목적으로 변호사법의 개정 작업이 시작된 것인데, 변호사가 근대 사법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법조 3륜의 한 축이므로 이 작업이 결코 쉬울 수 없음은 자명하다. 내가 법무과장으로 발령받은 직후부터 추진된 이 개정 작업은 나의 재임 중 끝을 보지 못했다. 이 변호사법은 1982년 12월 31일에 개정되었으므로 나의 후임이었던 신창언(申昌彦) 과장 재임 중 마무리되었다.


장관 특명으로 변호사법 개정 착수
일부조문 개폐 아닌 전문 개정작업
담당 법무과는 24시간도 부족한데
조사과에서 일거리 좀 달라고 자청
조사과장 책임으로 작업 마무리


특수제3부장 재임하던 1983년 5월
당시 변협회장이 예고도 없이 방문
‘변호사법 개정 감사패’ 직접 전달
업무 주임 검사나 조사과장이 아닌
나에게 전달된 이유는 아직도 몰라


이 법 개정의 주요 내용은 법무법인 제도의 창설과 변호사단체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첫째, 법무법인은 법무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 설립하도록 하는 한편, 법조 경력 15년 이상인 자 2인을 포함한 5인 이상의 변호사로 구성하며, 구성원 아닌 변호사와 분사무소를 둘 수 있고, 법인의 명의로 변호사 및 공증인의 업무를 행하며, 법무법인에 관하여는 상법 중 합명회사의 규정과 공증인법을 준용한다.

 

둘째, 변호사단체의 자율성을 강화하고 공공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변호사단체의 법률구조 의무 및 변호사 연수 제도를 실시하고, 변호사의 등록 업무를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대한변호사협회로 전면 이관하되, 부당 등록 및 등록 거부에 대한 시정명령 권한을 법무부 장관에 남겨 두고, 법무부 장관의 변호사 개업지 지시권, 변호사단체의 총회 임석권과 의사정지권 등 규제 내용을 전면 삭제하는 내용이었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내용의 법 개정이었으므로 이 법의 개정은 일부 조문의 개폐가 아닌 전문 개정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변호사법이 이렇게 개정됨으로써 오늘날 수많은 법무법인이 창설되고, 그 구성원인 변호사의 수도 수천 명에 이르게 된 것이며, 급변하는 고도산업사회에 부응할 수 있는 양질의 법률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는 기반이 구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변호사단체가 명실상부한 재야법조의 대의기관으로서 제 목소리를 내며 사회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반이 구축되기에 이른 것이다.180310_9.jpg

이 법 개정을 신창언 과장이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적어 둔다.

 

국가의 기본 6법 중 헌법을 제외한 나머지의 법률 모두를 손질하여 매듭짓기를 바라는 것이 신임 법무부 장관의 포부였던 터에 이 변호사법의 개정이 시급하였으므로 법무과의 사정이 어떠했겠는가? 법무과 검사들의 근무 시간은 1일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고, 수많은 현안이 쌓여 시급한 일이 산더미같이 밀려 있는 중에 이 개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위 신창언 과장의 당시 보직은 법무부 법무실의 조사과장이었다. 이 조사과는 1978년 5월 2일 법무실의 조직이 확대·개편되면서 신설된 부서였다. 사회의 급속한 발전에 발맞추어 정비를 요하는 각종 법령에 관한 연구를 위해 각종 사법 및 법무 자료 등의 체계적인 수집 활동을 수행하는 한편, 법무자문위원회의 운영을 활성화시켜 법무부가 제안하는 법령에 대해 위원회가 실질적인 토의 및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하여 신설된 부서였다.

그 본질적인 업무 자체가 이렇게 정적(靜的)이므로 하루 이틀 만에 무슨 큰 성과를 낼 일이 아닐뿐더러, 외부적으로도 과연 이 부서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도 알기 어려운 것이 그 사무의 본질적 성격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성미 급한 장관의 눈으로 본다면 이 조사과야말로 무슨 일을 하는 부서인지, 과연 검사나 직원이 열심히 일하는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법무부 전 간부가 참석하는 장관 주재의 회의 시에 이 조사과야말로 법무부의 사각지대라는 지적이 있게 된 이후,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회의 시마다 이런 지적을 받게 되니 조사과장 이하 직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창언 과장은 내 처의 고종사촌 오빠로서 나의 대학 1년, 고시 2기 후배였다. 하루는 나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님! 장관님께서 매번 조사과를 사각지대라고 말씀하시며 심지어 사무실에까지 불쑥 나타나시니 이래서야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래도 조사과가 폐지될 것이 분명하므로 검사들과 상의한 결과 법무과에서 고생하는 일 중 한 덩어리를 맡아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변호사법 개정 작업을 저희 과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은 이런 때 쓰는 말이렷다! 즉시 두 사람이 장관실에 달려가 그 취지를 고하였다. 이런 경위로 변호사법의 개정 작업이 조사과장의 책임으로 마무리되기에 이른 것이다.

내가 서울지방검찰청 특수3부장의 발령을 받던 때, 그가 조사과장으로부터 법무과장으로 영전하게 된 것은 이 변호사법의 개정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한 인사권자의 배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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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제5회 천고법치문화상 시상식에서 송종의(오른 쪽) 전 법제처장이 1983년 대한변협에서 받은 감사패(오른 쪽 아래)를 이종엽 협회장에게 다시 기증했다.
 <제공=천고법치문화재단>

 

서울지방검찰청 특수 제3부장 재임 시절인 1983년 5월 21일 제31대 대한변호사협회의 협회장인 김택현(金澤鉉) 변호사님께서 예고 없이 나의 사무실을 찾아오셨다. 깜짝 놀라 그 어른을 영접했는데, 나에게 감사패를 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 했다. 그의 손에는 변호사단체의 자치활동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변호사법의 개정에 대한 감사의 뜻이 담긴 감사패가 들려 있었다.

현직 검사가 대한변호사협회의 협회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전례가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감사패가 법무과의 변호사법 개정 주임 검사였던 강신욱(姜信旭) 검사와 조사과장 신창언 검사가 아닌 송종의 검사에게 전달된 것이 과연 옳은지는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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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법무과장 재임 기간은 1년 4개월에 불과하였으나 그토록 포부가 대단하였던 그 장관님께서는 취임 1년 1개월을 넘지 못하고 야인이 되었다. 그의 후임으로 정치근(鄭致根), 배명인(裵命仁) 두 분의 장관을 더 모시게 되었고, 차관은 정태균(鄭泰均), 서동권(徐東權), 이영욱(李永旭), 정해창(丁海昌) 등 네 분이며, 법무실장은 백광현(白光鉉), 이준승(李準昇), 한영석(韓永錫) 등 세 분이었다.

이렇게 급히 돌아가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지낸 법무과장 재임 기간은 10년이라고 해도 될 만한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이 경력으로 나는 법무행정 전반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되었으며, 훗날 기획관리실장의 임무 수행에 도움이 될 만한 많은 경험을 얻었다.

 

서울지방검찰청 특수3부장으로 발령받던 때 “송 과장! 고생 많았소. 서열과 능력에 맞지 않게 그동안 잘못되었던 인사를 이제 바로잡아 본부 과장 중 송 과장 한 사람만을 서울 본청의 부장검사로 발령했으니 정진하시기 바라오.”라며 내 손을 잡고 격려하시던 배명인(裵命仁) 장관님께 경의를 표한다.

이렇게 많은 험담을 늘어놓게 된 화제의 주인공 제31대 법무부 장관 전강(典岡) 이종원(李鐘元) 씨의 영전에 머리 숙여 깊이 사죄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명복을 비는 바이다.

소나기를 피하여 엎드려 있으면서 어느 눈에도 크게 띄지 못하였던 나를 고등검찰관으로 승진시켜 법무부의 50년 적자(嫡子)인 법무과의 과장으로 영전시켜 준 장관!

 

공직 재임 중 각고의 노력으로 해박한 지식을 쌓아 오면서 경제범죄에 일가를 이루어 후세에까지 그 분야의 대가로 칭송받을 만한 학문적 성과를 이룬 학구적이었던 장관!

 

앞을 내다보는 혜안으로 법조계에 곧 닥쳐올 큰 변화를 예측하고, 만반의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였던 눈 밝은 선각자!

 

때로는 따뜻한 미소로 두툼한 손을 내밀어 악수하며 격려해 주는 인간미도 있었던 상사!

 

그러했던 장관이 괴팍스러운 성정으로 인하여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더구나 그의 사후에 화제의 주인공이 되니, 이 글을 쓰는 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사람이 일생을 한 번 사는 것이기에 한 번 저지른 잘못도 돌이키기 어렵나니, 자허원군께서도 이미 지나간 옛일을 굳이 돌이켜 생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사이과이물사(事已過而勿思)’라 하신 가르침을 정말 크게 어긋나게 하였음이로다.

 

또, 무어라 하셨더냐? 사람이 마음속에 담아야 할 말씀을 끝낸 다음, 위에서는 하늘이 널 주시하고, 땅에서는 귀신이 늘 따라다니니[上臨之以天鑑 下察之以地袛], 이 말 평생토록 잊지 말고 경계하며 두렵게 생각하라[勸君自警於平生 可歎可驚而可思]고 하신 말씀을 잊었더란 말인가?

내가 헛되이 이 글을 써 놓았으니 지하의 영령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두렵기 그지없는 일이나 사실이 그러한즉, 후인을 경계하고자 하는 내 마음을 하늘과 땅은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로다.

1982년 8월 16일자로 표시된 나의 법무과장 재직기념패는 2개가 남아 있다. 하나는 법무과 소속 직원들의 연명이고, 다른 하나는 법무부 소속 고등검찰관과 검찰관 전원의 연명으로 제작된 것이다.

검사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鄭城鎭, 金鍾求, 金起秀, 申昌彦, 崔永光, 沈相明, 朱光逸, 李鎭江, 邊進宇, 申鉉武, 元正一, 金壽長, 姜信旭, 朴顯根, 秦炯九, 諸葛隆佑, 白三基, 趙鏞國, 尹東旻, 柳明建, 韓富煥, 金鶴在, 金大雄, 朴烋祥, 柳昌宗, 崔鉛熙, 金振煥, 張倫碩, 蔡秀哲, 柳國鉉, 李宗基.


이들 중 법무과 소속 검사는 姜信旭, 朴顯根, 柳明建, 朴烋祥, 李宗基 등 다섯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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