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송종의 회고록 전문 (6)

[송종의 회고록 전문 (6)]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2부 가필(加筆) ⑥ 피난처 법무연수원

2022_song_book.jpg

 

 

“선배님은 역사의 발전 법칙 제대로 아십니까?”


법무부 검찰국 검사

(1980. 6. 12. - 1981. 4. 29.)


법무부에 보존된 나의 인사 경력 카드에는 법무부 검찰국 검사라는 직명이 표시되어 있으나 이는 본직의 명칭이고, 실제로는 당시 수원에 있던 법무연수원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검사였다.

위 파견 근무는 나의 희망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데, 내가 검사로 생활하는 동안 상사에게 인사 청탁을 한 적이 세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발령된 때 공안부에 배속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형사 제3부로부터 공판부로 전속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가 법무연수원 파견 근무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것이었다.

세 번째의 청탁 이유를 밝힌다.

 

서울지검 형사 제3부 소속 검사로 근무하는 동안 처리한 사건 중 인사권자가 관심을 가진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건관계자가 그와 친분이 있었던지 사건의 결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나를 모함했던 것 같다. 이런 사실을 사후에 알게 되었으나, 그 당시 그 사건의 전말을 인사권자에게 자세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일개 평검사에 불과한 내가 무슨 방도로 그 상사에게 해명할 수 있었겠는가?

서울지검 근무를 마칠 때에는 검사 경력이 10년을 초과하였으므로 고등검찰관으로 승진하여야 하는 시점이었으나, 그의 오해를 풀지 못하는 한 승진할 가망이 별로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게다가 내가 서울에서 근무한 기간은 성동지청, 법무부 및 서울지검 본청 세 곳을 합하여 7년 2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반면, 20명 가까이 되는 나의 검사 임관 동기생 중에는 그때까지 서울 땅을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한 동료도 있었다. 그들의 비난도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인사권자의 오해까지 생겼으니 상황이 난처해진 것이다. 잠시 소나기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우선 서울을 떠나는 것이 옳을 것 같아 법무연수원 파견 근무를 자청하였던 것이다.

위 파견검사는 수사검사가 아님은 물론, 법무행정에 관여하는 검사도 아니었던 탓에 지원자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법무연수원이 서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100여 리나 떨어져 있는 수원에 위치하여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지원자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법무연수원에서 실시되는 검사의 각종 교육과정을 검사가 짤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내가 파견되기 몇 년 전부터 1명 또는 2명의 검사가 파견되어 그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였으므로 나의 처지를 이해하는 법무부의 검찰 선배가 나의 청을 들어줌으로써 파견 근무가 성사된 것이다.

 

180143_5.jpg
1981년 법무연수원 전경

  

나의 연수원 발령 시 임관 동기생이 아닌 사법시험 2기 후배가 이미 고등검찰관의 직위로 승진되는 인사 발령이 있었다. 인생이 마라톤 같은 역정이니 잠시 빨리 달려 본들 종착점에서야 무슨 큰 차이가 있겠는가? 이런 심정으로 나는 파견 근무를 자청했고, 그 인사 발령을 오히려 고맙게 여겨 수원 땅을 밟은 것이었다.

내가 1993년에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장이 되었을 때, 나를 오해했던 그 인사권자로부터 전화가 있었다. 영전 축하의 의례적인 내용과 함께 본인이 오랜 기간 나에 대한 오해가 있던 사실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취지의 전화였다. 내가 수도검찰청의 책임자가 된 사실이 그런 의례적인 전화를 하게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오해했기 때문에 뒤늦게나마 미안한 뜻을 전하려 한 것인지 당시로는 판단하기 어려웠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30여 년의 긴 기간 공직 생활을 하면서 장관의 직책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적으로 남의 인사에 영향을 미친 일이 적지 않았다. 위 인사권자는 뒤늦게라도 자신의 오해를 나에게 말하여 미안하다는 뜻을 표시하였으나, 나는 그런 잘못된 오해로 남의 장래를 그르친 일이 과연 없었을까? 무서운 일이다.

내가 연수원에 근무한 기간은 만 10개월 반 정도다. 한여름에 발령받아 가을과 겨울을 지내고 봄이 시작될 무렵, 법무부 법무과장으로 전보되었다.

연수원 건물은 당시 수원교도소와 인접하여 건축된 하얀색 2층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여기서 2년 전인 1978년 여름에 검사 경제반 교육과정을 이수한 바 있고, 부임 직전 검사이념교육 특별과정을 마친 바 있어서 낯설지는 않은 곳이었다. 다만 이곳이 수원이었으므로 서울로부터 출퇴근이 어려웠던 것이 흠이었다.

나는 서울지방검찰청에 근무할 당시 자동차운전면허를 취득한 후 즉시 포니자동차를 구입하여 운전하고 다니던 터였으므로 이 차를 몰고 서울 방배동 집으로 출퇴근을 했다. 지금은 교통망이 대폭 확충되어 운행이 편리하고 운행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게 되었으나, 당시는 서울-수원 간의 국도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였으므로 편도에 약 1시간가량 소요되는 형편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1·4 후퇴 시 괴나리봇짐을 메고 걸어서 넘어가던 그 ‘지지대고개’라는 곳을 매일 오가며 출퇴근했다.

이런 출퇴근 생활을 하던 중 큰 교통사고도 당했다. 지지대고개 부근의 어떤 큰 교차로에 이를 무렵, 갑자기 진행신호가 정지신호로 바뀌기에 급제동을 했더니 차 뒤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내 차 뒤에 바짝 따라붙어 달려오던 큰 버스가 미처 정차하지 못하고 내 차의 뒷부분을 들이받은 큰 사고였다.

한동안 정신이 혼미하여 차에서 내리지 못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버스의 앞 범퍼가 내 차의 뒷좌석에까지 밀려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신을 가다듬어 상황을 판단하면서 몸을 움직여 보니 목 부분의 움직임이 매우 불편할 뿐 어떤 외상도 없었다. 황급히 내 차 운전석에 다가와 운전석 문을 열고 나를 쳐다보던 버스 운전사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의 얼굴은 말 그대로 사색이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자동차의 종합보험제도가 확립되지 못하여 책임보험이나 자동차 공제조합의 적립금으로 사고의 손해배상을 담당하던 시기였다. 내가 큰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그 운전자는 자신의 일방적인 과실로 이런 사고가 난 것이므로 책임지고 버스회사에서 이 차를 수리해 드릴 것이라면서 연신 용서를 비는 내용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잘못이 없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이런 사고가 난 것이라고 시인하며 눈물 흘리는 그 운전사가 가여워 차만 제대로 수리하라고 이른 후 사고 수습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나는 일주일 정도 목의 움직임이 매우 불편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내가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은 이후 겪었던 가장 큰 교통사고였다.

 

검사 10년 차 넘어 승진할 시점
인사권자의 오해로 성사 불투명


역사 공부에 대한 갈증도 있어

연수원 근무 자청…독서에 매진
‘대한국사’‘대세계의 역사’총 24권
겨울철 냉랭한 강의실에서 독파


이때 습득한 역사지식 바탕으로
나의 역사관 · 세계관 서서히 정착

 

‘대세계의 역사’ 속의 몇 구절

“즐거운 것은 술”

“괴로운 것은 나그네 길”

인류의 보편적 느낌 변함없어 


나의 연수원 부임 당시 연수원장으로 계시던 분은 당시의 집권 세력이었던 신군부의 압력에 따라 사표를 제출하여 원장 자리가 공석인 채 부원장이 연수원의 운영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분께서는 내가 형식상 성동지청에 적을 두고 있을 때 그 소속 부장검사였던 분이었으므로 내게 큰 도움을 주신 분이다.

검사에 대한 교육과정이 대부분 봄가을에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검사의 교육과정 몇 개를 준비하여 계획을 세운 다음 강사를 선정하고 그 강사를 초빙하기 위하여 시간을 조정하면서 교육과정을 마련하면 대강 큰일을 마칠 수 있었고, 교육에 참가한 검사들의 불편함을 덜어 주기 위한 세심한 배려 이외에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검사가 되고 나서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 일한 적이 별로 없었으므로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나름대로 보람을 찾으며 업무를 수행하였다.

가을이 되어 날씨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연수원 역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건물이어서 냉·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큰 규모의 강의실에 난방이 될 리 없었고, 나의 사무실이란 곳도 2층의 강의실 한쪽에 칸을 막아 마련한 곳이었으므로 한겨울을 지내는 일이 큰 걱정이었다. 내가 이때 큰 결심을 하게 되는데, 이 결심이 훗날 나의 영혼을 살찌게 하면서 한 단계 더 성숙한 인간이 되게 만들어 주었다.

내가 국방부 비상군법회의에 파견 나가 근무하는 동안 수많은 학생을 접하며 대화도 나누고 조사도 하며 그들의 공판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이들(주로 서울대학교 재학생이거나 졸업생들이다)이 내게 조롱하는 듯한 어조로 하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선배님께서 역사를 얼마나 공부하셨습니까? 과연 인류 역사의 발전 법칙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이런 투의 질문이었다.

사실 나는 그들을 피의자 또는 참고인으로 조사하면서 이들이 한결같이 앵무새처럼 떠들어 대는 소위 역사의 발전 법칙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당시 구금되었던 유명한 어느 시인이 달필로 써 내려간 자술서에 나타나는 ‘마르크스의 푸른 정열’이란 용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역사에 관한 지식은 고등학교 때 배운 한국 근대사의 단편적 지식이나『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객관적 사실 몇 가지가 전부였다. 고등고시를 위해 공부할 무렵 국사라는 과목이 있었으나 이는 선택과목 중의 하나였고, 나는 이 국사 과목을 선택하지 않고 나머지 6개의 법률 과목과 법철학을 공부하여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다.

나는 어린 후배들의 이런 조롱을 들어가며 생각했다. 내게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역사 공부를 하리라. 내가 그 공부를 마치게 될 즈음, 너희들은 내가 알고 있는 역사의 발전 법칙을 내게 배워야 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180143_6.jpg
대세계의 역사 12권 <사진=yes24 제공>

 

이제 드디어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할 기회가 나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연수원으로 발령받기 이전에 이미 나는 이선근 씨의 저서인 『대한국사』 전 8권을 구입하여 소지하고 있었다. 연수원의 도서관에 소장된 장서 목록을 살펴보니, 『대세계의 역사』 전 12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옳지! 이제부터 나는 위 20권의 역사책을 완독하여 나름대로 역사 공부를 시작한다. 이것이 나의 인생을 값지게 한 보람된 결심이었다.

이선근 씨의 『대한국사』 전 8권은 국판보다 좀 더 큰 규격이고, 『대세계의 역사』라는 책은 저자가 개인이 아니라 삼성출판사에서 엮은 책으로서 인류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서양을 비교하며 시대순으로 편집했던 책으로 기억된다. 이는 16절 판 정도의 규격이었다. 요즘 흔히 발간되는 국판 정도의 규격으로 책을 만들었다면 아마도 10,000페이지는 족히 넘는 분량의 책이었을 것이다.

이 책을 독파하기 위하여 처음 준비한 것은 등산 때 사용하는 슬리핑백(sleeping bag)이었다. 검사 교육과정이 없는 한겨울에 난방이 되지 않는 곳에서 이 책들을 읽어야 하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체온을 보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슬리핑백으로 몸을 감싸고 책상에 앉아 책을 읽을 작정이었다.

드디어 책 읽기가 시작되었다. 시급한 일이 없으면 즉시 사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먼저 읽기 시작한 『대한국사』 전 8권을 독파하고 나니, 어느덧 추운 겨울이 되었다. 난방이 제대로 될 리가 없으니 이제부터는 슬리핑백이 드디어 그 효용을 발휘할 때가 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독방에서 미친 사람처럼 그 속에 들어앉아 얼굴만 내밀고 앉아 있다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아니다.

 

180143_7.jpg
대한국사 12권 <제공=송종의 장관>

 

날씨가 하도 추워서 슬리핑백 속에서 손을 내밀기 싫어 입으로 불면서 책장을 넘기기도 했다. 『대세계의 역사』 전 12권은 거의 이런 상태에서 읽기 시작하여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 완전히 일독을 마쳤다. 이미 읽어 본 부분을 다시 읽은 것도 많았다.

 

내가 우리나라의 조상과 인류의 역사를 모두 알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이 세상을 살아왔으며, 그들이 이룩한 정신문명의 흔적이 무엇인지, 그들이 그렇게 애써 이룩한 문화의 정수가 어떤 형태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인지, 이 흐름의 대강만은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름대로 역사의 발전 법칙을 세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마르크스의 붉은 이념과 푸른 정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의 대학 후배들이 내게 들이대며 조롱하듯 물어 온 역사의 발전 법칙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이때 습득하였던 역사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뜻깊은 일이었다.

 

속칭 한직이라는 직책에 부임하여, 그것도 스스로 원하여 가게 되었던 직책에 감사하며, 하늘의 고마운 뜻을 새삼스럽게 절감하였다.

 

180143_4.jpg
김세권 전 서울고검 검사장

 

이렇게 지내는 동안 당시 법무연수원 부원장으로서 원장 직무대리로 근무하셨던 김세권(金世權) 검사장께서 나의 승진을 위해 힘썼던 사실을 들어 알게 되었다. 당시의 검찰국장이 그분의 대학 후배로 고등고시 동기였으므로 그에게 나의 승진을 부탁하셨던 모양이다. 검찰국장께서 인사권자인 장관께 나를 고등검찰관으로 승진시킴이 좋겠다고 몇 번 진언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하였다는 내용을 들어 알게 되었다.

 

김 검사장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그 사정을 설명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감명 깊다. “송 검사! 날씨가 추워 땅이 녹지 않았으나, 봄이 되면 저절로 녹지 않겠소? 책이나 읽으며 봄을 기다리시구려.”

『대세계의 역사책』 어디엔가 들어 있는 몇 구절이 생각난다. 인류 최초의 문자였던 수메르 문자로 바빌로니아의 점토판에 새겨진 내용을 해독해 보니 다음과 같았다.

 

“요새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 즐거운 것은 술, 괴로운 것은 나그네 길.”


두 눈과 두 귀, 하나의 입과 코,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졌던 인류가 보편적으로 느낀 점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구나!

이런 값진 보람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김세권 선배님께 경의를 표한다.

 

관련 법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