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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

[송종의 회고록]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7-2)

2부 가필(加筆) ⑦ 이 글을 남겨도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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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법 전문 개정의 배경과 숨은 사연


법무부 법무실 법무과장 - Ⅱ
(1981. 4. 13. ~ 1982. 8. 15.)

 

다음은 법무과장 재직 당시 장관의 특명으로 시작된 변호사법 개정 작업에 관한 이야기다.

 

제5공화국 출범 직후 1981년부터 사법시험 합격자를 매년 300명으로 늘려 변호사 수가 대폭 증가했다. 이전에는 변호사 업무 영역이 전문화되지 못한 채 변호사 한 사람이 각종 민·형사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변호사 몇 명이 모여 합동으로 개업하는 일도 있긴 했으나, 대부분 공증사무를 처리할 수 있는 혜택을 받고자 함이었다. 만능 변호사 1인의 시대가 지나고 고도산업사회에 맞는 변호사 제도 확립이 절실했다.

 

장관은 변호사 업계의 당시 상황을 “일성일주풍조(一城一主風潮)”라고 지적했다. 또 변호사단체가 공익활동을 함에 있어 법무부의 감독 권한을 축소해 단체의 자율성을 높일 필요도 있었다.

 
이런 목적으로 시작은 했으나, 이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1981년 초 추진된 개정 작업은 내 후임인 신창언(申昌彦) 과장 재임 중인 1982년 12월 31월 마무리됐다.


장관 특명으로 변호사법 개정 착수
일부조문 개폐 아닌 전문 개정작업
담당 법무과는 24시간도 부족한데
조사과에서 일거리 좀 달라고 자청
조사과장 책임으로 작업 마무리


특수제3부장 재임하던 1983년 5월
당시 변협회장이 예고도 없이 방문
‘변호사법 개정 감사패’ 직접 전달
업무 주임 검사나 조사과장이 아닌
나에게 전달된 이유는 아직도 몰라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법무법인 제도 창설과 변호사단체의 자율성 강화다.

 

첫째, 법무법인은 법무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 설립하도록 하되 법조 경력 15년 이상인 자 2인을 포함한 5인 이상의 변호사로 구성하며, 구성원 아닌 변호사와 분사무소를 둘 수 있고, 법인의 명의로 변호사 및 공증인의 업무를 행하며, 법무법인에 관하여는 상법 중 합명회사의 규정과 공증인법을 준용한다.


둘째, 변호사단체의 자율성을 강화하고 공공성을 제고하기 위해 변호사단체의 법률구조 의무 및 변호사 연수 제도를 실시하고, 변호사의 등록 업무를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대한변호사협회로 전면 이관하되, 부당 등록 및 등록 거부에 대한 시정명령 권한을 법무부 장관에 남겨 두고, 법무부 장관의 변호사 개업지 지시권, 변호사단체의 총회 임석권과 의사정지권 등 규제 내용을 전면 삭제하는 내용이었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내용의 법 개정이었으므로 일부 조문의 개폐가 아닌 전문 개정의 형식으로 이뤄졌다.

법 개정을 통해 오늘날 수많은 법무법인과 수천 명에 달하는 구성원 변호사가 생겼고, 급변하는 고도산업사회에 맞는 양질의 법률서비스 제공 기반이 구축되었으며, 변호사단체가 명실상부한 재야법조의 대의기관으로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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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안을 신창언 과장이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에피소드를 적어 둔다.

 
국가 기본 6법 중 헌법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손질하겠다는 것이 신임 법무부 장관의 포부였으니 법무과 사정은 어땠겠는가? 하루 24시간이 모자랐고, 수많은 현안 업무가 산더미같이 밀려있는 중에 이 개정 작업이 시작됐다.

 
후임 신 과장은 당시 법무실 조사과장이었다. 조사과는 1978년 법령 연구를 위한 자료 수집 및 법무자문위원회 운영 지원 등을 위해 신설된 부서였다. 과의 성격 상 하루 이틀 만에 큰 성과를 낼 일도 없었고, 외부적으로도 눈에 띄는 부서가 아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성미 급한 장관은 조사과 직원들이 일을 제대로 하는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법무부 전 간부가 참석하는 장관 주재 회의 시에 이 조사과야말로 법무부의 사각지대라는 지적이 있게 된 이후,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회의 시마다 이런 지적을 받게 되니 조사과장 이하 직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 과장은 내 처의 고종사촌 오빠로서 나의 대학 1년, 고시 2기 후배였다. 하루는 나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님! 장관님께서 매번 조사과를 사각지대라고 말씀하시며 심지어 사무실에까지 불쑥 나타나시니 이래서야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래도 조사과가 폐지될 것이 분명하므로 직원들과 상의한 결과 법무과에서 고생하는 일 중 한 덩어리를 맡아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변호사법 개정 작업을 저희 과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은 이런 때 쓰는 말이렷다! 두 사람이 바로 장관실에 달려가 그 취지를 고했다. 이런 경위로 변호사법 개정 작업이 조사과장의 책임으로 마무리되기에 이른 것이다.

내가 서울지방검찰청 특수 제3부장으로 발령 받던 때, 그가 조사과장으로부터 법무과장으로 영전하게 된 것은 이 변호사법 개정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한 인사권자의 배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수 제3부장 재임 시절인 1983년 5월 21일 제31대 대한변호사협회의 협회장인 김택현(金澤鉉) 변호사님께서 예고 없이 나의 사무실을 찾아오셨다. 깜짝 놀라 그 어른을 영접했는데, 내게 감사패를 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 했다. 그의 손에는 변호사단체의 자치활동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변호사법의 개정에 대한 감사의 뜻이 담긴 감사패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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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제5회 천고법치문화상 시상식에서 송종의(오른 쪽) 전 법제처장이 1983년 대한변협에서 받은 감사패(오른 쪽 아래)를 이종엽 협회장에게 다시 기증했다.
 <제공=천고법치문화재단>

 

현직 검사가 대한변호사협회의 협회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전례가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감사패가 법무과의 변호사법 개정 주임 검사였던 강신욱(姜信旭) 검사와 조사과장 신창언 검사가 아닌 송종의 검사에게 전달된 것이 과연 옳은지는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편집자 주-이 감사패가 변호사법 개정의 사료라고 생각한 필자는 이 글을 쓴 6년 뒤 2021. 11. 16. 개최된 제5회 천고법치문화상 시상식에 하객으로 참석한 이종엽 제51대 대한변호사협회장에게 다시 이 패를 증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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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법무과장 재임 기간은 1년 4개월에 불과했으나 그토록 포부가 대단했던 그 장관님께서는 취임 1년 1개월을 넘지 못하고 야인이 되었다. 그의 후임으로 정치근(鄭致根), 배명인(裵命仁) 두 분의 장관을 더 모시게 되었고, 차관은 정태균(鄭泰均), 서동권(徐東權), 이영욱(李永旭), 정해창(丁海昌) 등 네 분이며, 법무실장은 백광현(白光鉉), 이준승(李準昇), 한영석(韓永錫) 등 세 분이었다.

이렇게 급히 돌아가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지낸 법무과장 재임 기간은 10년이라고 해도 될 만한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이 경력으로 나는 법무행정 전반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됐으며, 훗날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임무 수행에 도움이 될 많은 경험을 얻었다.


서울지방검찰청 특수 제3부장으로 발령받던 때 “송 과장! 고생 많았소. 서열과 능력에 맞게 본부 과장 중 송 과장 한 사람만을 서울 본청의 부장검사로 발령했으니 그 뜻을 알고 정진하시기 바라오”라며 내 손을 잡고 격려하시던 배명인(裵命仁) 장관님께 경의를 표한다.

이렇게 많은 험담을 늘어놓게 된 화제의 주인공 제31대 법무부 장관 전강(典岡) 이종원(李鐘元) 씨의 영전에 머리 숙여 깊이 사죄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명복을 비는 바이다.

소나기를 피하여 엎드려 있으면서 어느 눈에도 크게 띄지 못하였던 나를 고등검찰관으로 승진시켜 법무부의 50년 적자(嫡子)인 법무과의 과장으로 영전시켜 준 장관!


공직 재임 중 각고의 노력으로 해박한 지식을 쌓아 오면서 경제범죄에 일가를 이루어 후세에까지 그 분야의 대가로 칭송받을 만한 학문적 성과를 이룬 학구적이었던 장관!


앞을 내다보는 혜안으로 법조계에 곧 닥쳐올 큰 변화를 예측하고, 만반의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였던 눈 밝은 선각자!


때로는 따뜻한 미소로 두툼한 손을 내밀어 악수하며 격려해 주는 인간미도 있었던 상사!


그러했던 장관이 괴팍스러운 성정으로 인하여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더구나 그의 사후에 화제의 주인공이 되니, 이 글을 쓰는 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사람이 일생을 한 번 사는 것이기에 한 번 저지른 잘못도 돌이키기 어렵나니, 자허원군께서도 이미 지나간 옛일을 굳이 돌이켜 생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사이과이물사(事已過而勿思)’라 하신 가르침을 정말 크게 어긋나게 하였음이로다.


또, 무어라 하셨더냐? 사람이 마음속에 담아야 할 말씀을 끝낸 다음, 위에서는 하늘이 널 주시하고, 땅에서는 귀신이 늘 따라다니니[上臨之以天鑑 下察之以地袛], 이 말 평생토록 잊지 말고 경계하며 두렵게 생각하라[勸君自警於平生 可歎可驚而可思]고 하신 말씀을 잊었더란 말인가?

내가 헛되이 이 글을 써 놓았으니 지하의 영령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두렵기 그지없는 일이나 사실이 그러한즉, 후인을 경계하고자 하는 내 마음을 하늘과 땅은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로다.

<정리=박솔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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