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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의 법문정답

[박성민의 법문정답] (5) 새로운 체제를 기다리며

法問政答 : '법이 묻고 정치가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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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전쟁과 스포츠 중간 어디 쯤 있을 겁니다. 전쟁으로 가까이 가면 상대를 ‘죽일’적으로 보고, 스포츠로 가까이 가면 ‘이길’경쟁자로 봅니다. 법철학자 칼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를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날카로운 통찰입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까지 모든 전쟁, 혁명, 사화는 ‘통치자’와 ‘피치자’를 가르는 싸움이었기 때문에 이긴 자가 진 자를 죽이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체제 안에서 싸운 게 아니라 체제를 둘러싸고 싸웠기 때문입니다. 왕정이냐 공화정이냐, 법가냐 유가냐,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모두 체제를 다투는 싸움입니다.

 
전쟁 같은 정치의 시대가 끝나고 정치는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승리하면 여당이 되고 패배하면 야당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아담 쉐보르스키가 민주주의를 ‘여당이 (평화적으로) 야당이 될 가능성을 열어두는 체제’로 정의한 것은 탁견입니다. 우리는 1987년에 ‘쿠데타’와 ‘혁명’을 동시에 폐기하고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가 가능한 체제에 합의했습니다. 이른바 ‘1987 체제’입니다.

 

저는 ‘촛불’보다는 ‘투표’가 힘이 세고, 투표보다는 ‘제도’가 힘이 세다고 믿습니다. 촛불은 광장을 상징합니다. 1960년 4월, 1987년 6월, 2016년 12월, 우리는 광장에서 권력을 끌어내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독재를 무너뜨렸다고 ‘새로운 체제’가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니라는 냉정한 사실을 역사는 일깨워줍니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에 기대했던 민주주의는 쿠데타에 짓밟혔습니다. 촛불과 광장이 권력을 무너뜨릴 수는 있어도 새로운 체제를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는 시스템을 바꾸고
시스템은 패러다임을 바꿔
다시 한번 도약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는 언제 올까

 


촛불보다 투표는 더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누가 대통령이냐에 따라 나라의 정치·경제·외교·안보도 달라지지만 개인도‘정신적’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프랑스 작가 장 폴 뒤부아는 <프랑스적인 삶>이라는 소설에서 한 프랑스 남자의 자화상을 다섯 번이나 바뀐 정권의 변천사 속에서 밀도 있게 그려냈습니다. 책의 목차가 인상 깊습니다. 1. 샤를 드골 2. 알랭 포에르(1) 3. 조르주 퐁피두 4. 알랭 포에르(2) 5.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6. 프랑수아 미테랑(1) 7. 프랑수아 미테랑(2) 8. 자크 시라크(1) 9. 자크 시라크(2)

이런 제목, 이런 목차의 소설이라면 한국이 제격입니다. <한국적인 삶>이라는 소설의 목차가 1. 박정희 2. 최규하 3. 전두환 4. 노태우 5. 김영삼 6. 김대중 7. 노무현 8. 이명박 9. 박근혜 10. 문재인으로 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들이 우리의 정신 세계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프랑스는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는 단순히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건강을 건 실존적 선택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대통령 선거가 중요해도 ‘불가역적’변화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시스템의패러다임을 바꾸는 ‘제도’만이 불가역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제도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변화는 법을 통해서 옵니다. 특히 ‘새로운 체제’는 헌법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1987 체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새로운 체제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탄핵 연대’를 ‘개혁 연대’로 전환시켜 ‘2017 체제’를 만들 역사적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 보냈습니다.

체제는 불가역적입니다. 이제 쿠데타는 불가능합니다. 제도는 시스템을 바꾸고, 시스템은 패러다임을 바꿉니다. 시스템은 공정하고 예측가능한 ‘대기번호표’ 같은 것입니다. 안착되면 그 이전으로 되돌아 가지 못합니다.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도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체제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체제는 개헌 없이는 안 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아무리 많은 사람이 투표를 해도 불가역적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새로운 체제만이 불가역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새로운 체제는 언제 올까요. 해가 바뀔 때마다 기대해보지만 늘 실망으로 끝납니다. 과연 ‘2023 체제’, ‘2024 체제’, ‘2025 체제’는 올까요.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마음으로 저는 오늘도 ‘새로운 체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박성민 대표 (정치컨설팅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