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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신과 함께

[법의 신과 함께] 할아버지와 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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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는 법정에서 검정 바탕에 자줏빛 깃으로 장식된 법복을 입는다. 법복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데다가 소매도 한복 소매처럼 널찍해 거추장스럽다. 통풍도 잘 되지 않는 소재인지라 꿉꿉한 여름철에 법복을 입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찜통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법복 안에다 셔츠를 갖춰 입고, 넥타이까지 매야 하기 때문에 공판이 끝나면 바짓단까지 땀에 젖기 일쑤이다. 이렇다 보니 법복을 입은 채 더위를 참고 있으면 단정히 정장만 갖춰 입으면 되지 않나 하는 불만이 생기곤 한다.

 

하지만 법복은 시그널이 아닐까 한다. 법정에서 검사가 법복을 입는 이유는 그이가 공권력을 행사하는 특별한 지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이 검사에게 부여한 의무를 자각하고, 공권력이 가지는 엄중함을 다시금 되새기라는 의미일 테다. 법복의 검정 바탕은 어떤 색깔에도 물들지 않는 검은색처럼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말라는 뜻이라고도 하니, 법복을 입을 때마다 그 뜻을 떠올리라는 의미로 검사에게 법복을 입히는 게 아닐는지.

 
검사가 유일하게 법정 밖에서 법복을 입는 때가 있다. 바로 신임검사 임관식이다. 임관식에는 특별한 순서가 있다. 부모님이나 배우자가 신임검사에게 법복을 입혀 주는 세리머니다. 신임검사에게 법복을 입히고 단추를 잠가주는 그 순간만큼은 얼굴에 웃음 한 가득이었던 가족들의 얼굴에도 눈물이 흐른다.


검사 선발 전형 합격 소식 듣고
눈물로 축하해 주시던 할아버지
임관식도 못 보시고 세상 떠나
법복을 입을 때마다 그리움이…

  

"법무부 인사담당자입니다. 검사 선발전형에 합격하셨습니다.” 이불솜 만한 함박눈송이가 하염없이 내리고, 연말 분위기가 넘실거리던 왁자지껄한 겨울밤이었다.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헐레벌떡 휴대전화를 꺼냈다. 외할아버지께 가장 먼저 전화를 걸었다. 잠자리에 드셨는지 할아버지는 다이얼음이 한참동안 반복되고서야 전화를 받으셨다. “할아버지! 저 합격했어요!”

 

중학교 입학식 바로 전날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전주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 집을 찾으셨다. 그러나 언제나 아무런 말씀 없이 평상에 앉아 계시다가 집 안을 슥 둘러 보고만 가셨다. 할아버지가 앉아계시던 자리에는 쑥떡이며 부침개며 주전부리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가끔 할아버지와 전주천변을 걷기도 했는데, 그때에도 종종걸음으로 할아버지를 뒤따르는 나에게 “밥 잘 챙겨 먹어.”라고 한 마디 건네실 뿐이었다.

 
어린 마음에 용건도 없이 매일 집에 찾아오는 할아버지가 불편했다. 감시를 받는 기분이 영 갑갑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보니, 할아버지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셨다는 걸 알겠더라. ‘괜찮아. 잘 될거야.’, ‘다들 그리 살아.’ 하는 막연하고 가벼운 위로가 행여 아비 잃은 손자에게 상처를 줄 까봐 말을 아끼셨구나, 그저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일이, 괜찮아 질 때까지 기다리며 가만히 시간을 내어주는 일이 진짜 위로라고 생각하셨구나 싶다.

 

차가운 겨울날, 할아버지는 내 앞에서 처음으로 우셨다. 그날도 별 말씀 없이 한참을 훌쩍이시다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만 하셨다. 그리고… 좋아하시던 개나리꽃이 여물기 얼마 전, 병마에 쓰러지셨다. 할아버지는 임관식에 오지 못하셨다. 법복을 입혀 드리고, 법복 입은 할아버지와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무슨 징크스가 이리 지독한지 모르겠다만 입학식에서도, 임관식에서도 사랑하는 이 한 명의 빈자리는 무한했다.


검사실 한편, 한 벌뿐인 법복이 걸려 있다. 법정에 가기 위해 법복을 걸쳐 입고 매무새를 다듬을 때면 가끔씩 밀려오는 안타까움에 먹먹해 진다. 참으로 그가 보고 싶다.

 

 

정거장 검사(서울중앙지검·<슬기로운 검사생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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