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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 전문 (3)

[송종의 회고록 전문 (3)]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부 소묘 (素描) ③ 사상범과 민주화 운동 사이 - 서울지검 성동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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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히 몸을 낮추고, 남의 말은 신중히 하라


서울지방검찰청 성동지청

(1973. 4. 6. ~ 1975. 7. 22.)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 근무 기간 중 밤나무를 심고 상경한 다음 날 서울지방검찰청 성동지청의 검사로 부임하였다.

  

성동지청은 1971년 8월 2일 개청되었고, 같은 날짜로 서울 시내에 영등포지청이 개청되었으므로 서울 시내에 2개의 지청이 새로 생긴 것이다. 개청 당시에는 서울지방검찰청의 별관을 사용하다가 1972년 8월 31일 서울 성동구 구의동에 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으므로 청사는 비교적 넓고 깨끗해 보였다.

당시 초임 검사는 서울에 발령받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므로 내 밑에는 나보다 호봉이 낮은 검사가 없어서 서열은 역시 말석 검사의 신세를 면치 못하여 청사 아래층 한구석에 내 사무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서 통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며 8개월 정도 근무했다.

법무부의 인사 기록에 따르면 내가 이 검찰청의 검사로 2년 3개월여 근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상 이 건물에서 근무한 기간은 그렇지 않다.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가 공포되어 국방부에 비상군법회의가 설치되면서부터 나는 줄곧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관 및 비상고등군법회의의 검찰관 직무대리로 1년 6개월 가까이 근무하였으므로 이 검찰청에서 근무한 기간은 1년이 못 된다.

1974년 1월 8일 아침, 지청장의 지시로 대검찰청으로 출근하였다. 지청장께서도 대검에서 나를 부른 이유를 모르고 계셨으니, 나도 그 사연을 알 턱이 없었다.

당시의 사무분장표에 따르면 나는 경제사범 전담검사로서 물가저해사범 단속이 주된 임무였으므로 아마 이런 내용에 관한 대검의 무슨 지시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대검찰청 차장검사실을 찾아갔다.

대검찰청에 가서 보니 서울지검 본청 공안부 소속 3명의 검사와 영등포지청 소속 1명의 검사가 그곳에 와 있었다. 모두 나의 선배들이어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곳에 온 말석 검사였다. 선배 검사들이 나지막한 소리로 주고받는 내용을 엿들으니 무슨 큰 사태가 벌어진 듯했다.

잠시 후 대검 차장검사의 지시에 따라 5명의 검사 전원이 국방부에서 보내 준 지프차에 나누어 타고 용산구 삼각지에 있는 국방부 청사로 가게 되었다. 국방부 대회의실에 가 보니 육군 중장 여러 명을 비롯한 다수의 군 고급 장교들이 대오를 정리하고 서 있었다. 검사들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잠시 후 국방부 장관이 그 자리에 임석하여 행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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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월 송종의 당시 성동지청 검사가 서종철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비상군법회의 검찰관 임명장을 받고 있다

그 행사는 대통령 긴급조치 제2호에 따라 국방부에 설치되는 비상보통군법회의와 비상고등군법회의의 재판장, 심판관 및 검찰관의 임명장 수여식이었다. 임명장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비상보통군법회의의 검찰관이 된 것을 알았다.

 

  

그 행사 후 나는 국방부 본 건물 뒤편에 있던 군부대의 막사에 마련된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몇 개의 책상이 준비된 시멘트 벽돌조 건물의 큰 방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1년 6개월 이상 국방부의 이 건물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성동지청 소재지인 성동구 구의동에 20평 남짓한 신축 가옥을 마련하여 거주하였던 터라 가까운 청사에 출근하지 못하고, 또 먼 길을 오가며 근무를 시작한 것이다. 국방부 당국에서 군법회의에 상근하는 검찰관들에게는 출퇴근용 군용 지프차를 배정해 준 덕분에 그나마 큰 불편을 겪지 않고 출퇴근할 수 있었다.

곧이어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가 발효되면서부터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관의 고된 업무가 시작된다. 수많은 운동권 학생과 반정부 재야인사의 검거가 잇따랐다. 당시 이 군법회의 운영은 국방부 법무관리담당관의 소관 사무였고, 그는 군법회의의 관할관인 국방부 장관의 명을 받아 검찰에서 파견된 검사들을 지휘하여 이 업무를 총괄해 나가고 있었다.

내게 첫 번째로 주어진 임무는 속칭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 총연합회)의 수괴로 지목된 이철(후에 국회의원 역임)에 대한 조사였다. 이철 군을 조사한 검사라는 사실이 후일 내가 민청학련사건의 주임 검사로 알려진 이유이다.

 

그 사실 이외에 민청학련사건 관계자 중 지도부 10여 명이 피고인으로 된 제1차 사건과 그 나머지 구성원에 대한 제2차 사건의 결심 공판에서 논고문을 써서 이들에게 구형한 검사가 나였으므로 그때부터 내가 이 모든 사건의 주임 검사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두 사건의 공소장은 5명의 파견검사 중 가장 선임이었던 검사가 서명하여 작성된 것이고, 판결문에도 역시 그렇게 명시되어 있으므로 법률적으로는 내가 아닌 그 선배가 주임 검사였다. 그런데 내가 이 두 사건의 결심 공판에서 논고문을 써서 그 요지를 낭독하며 구형을 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이 사건의 주임 검사였던 선배 검사는 소위 ‘인혁당 재건음모사건’의 주임 검사로서 그 사건에 매달려 민청학련사건 공판에 관여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방부 법무관리담당관이 나를 어떻게 본 것인지, 나에게 민청학련사건의 결심 공판에서 논고하라는 주문이 있었다. 송 검사가 이 사건의 주모자를 조사하였고, 오랜 기간 지켜보니 송 검사가 문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가 우렁차서 이 사건의 논고만은 송 검사가 맡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이 민청학련사건 관계자 중 내가 직접 조사하여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피의자는 민청학련사건 지도부 두 명에 불과했다. 파견검사 5명 중 말석 검사였던 내게 이런 큰 임무가 부여되었으므로 선배 검사들에게 미안한 일이기는 하나 당시 우쭐한 마음도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국방부 법무관리담당관의 의견이 이렇다 하더라도 나는 마땅히 이를 사양하여 선배 검사가 이 일을 맡아 처리하도록 그를 설득함이 당연하였으나, 일종의 공명심이 앞서서 별로 사양하지 않고 이 일을 맡아 처리하게 되었다.

 

이것이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내가 민청학련사건의 주임 검사로서 유신체제에서 명성을 날린 검사로 알려지게 된 사정이다. 공판정에 묶여 온 많은 학생이 내가 이 사건의 주임 검사라고 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자허원군성유심문』의 첫 구절이 ‘복생어청검(福生於淸儉) 덕생어비퇴(德生於卑退)’이다. 겸손해서 스스로 낮추고 물러날 줄 알아야 덕이 생긴다는 이 만고의 명언을 입으로만 외우고 있었으니, 이것이 내가 수십 년간 그들의 비난을 받으며 원성을 들어야 했던 근본적인 이유이다. 

  

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공포
영문도 모른 채 국방부 청사로


비상군법회의 검찰관에 임명돼
민청학련 관련 이철 조사 계기
‘민청사건’ 주임 검사로 알려져


장기 파견 부담 느껴 복귀신청
“일손 부족에 몸 아픈 검사도”


상관없는 사람 이름까지 들먹
당사자는 5년간 또 지방 근무

한 사람의 인생행로 바뀌게 해


위 민청학련사건 관계자 수십 명의 1심과 2심 재판이 마무리될 무렵, 나와 함께 국방부에 파견되었던 4명의 선배 검사들은 모두 소속 청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나는 1974년 8월 22일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관 겸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관으로 겸직 발령받고 소속 청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혼자 남아 국방부 군법회의의 사무실을 지켜야 했다. 국방부 장관이 법무부 장관에게 양해를 구하여 나를 겸직 발령시킨 후 나 혼자만을 국방부에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처리해야 할 시급한 사법사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 위반으로 입건되어 1·2심의 재판이 진행되었던 모든 사건의 뒤처리를 담당하기 위하여 나 한 사람만을 국방부에 남겨 두었던 것이다. 재판의 원심인 비상보통군법회의와 비상고등군법회의의 검찰관으로 형의 집행 등에 관련하여 처리해야 할 일이 잦았으므로 이런 조치는 법률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너무 오랜 기간 국방부에 파견 근무하였으므로 소속 청으로 복귀를 원한다는 뜻을 여러 번 법무부 검찰국에 전달하였으나 국방부에서 이에 응하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내가 법무부 검찰국 검찰 제3과 검사로 발령 나기 얼마 전에야 비로소 성동지청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해 7월 22일 자로 단행된 검찰 인사 발령에 따라 나는 법무부 검찰국 검찰 제3과 검사가 되었다.

내가 성동지청으로 복귀한 시정은 다음과 같다.

 

국방부에 혼자 남아 있으면서 처리할 일이 별로 많지 않았던 탓에 대화 상대도 없는 그곳에서 지내는 것이 검찰 동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 끝에 법무부의 검찰국장을 찾아가 면담을 신청하였다.

국방부의 사정을 설명하고 소속 청으로 복귀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더니 “자네는 그곳에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여겨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복귀 의사가 사실인가?”라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동지청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내가 자리를 비워 두고 있는 탓에 다른 검사들이 모두 고생하고 있을뿐더러, 소속 검사 한 사람이 몸이 불편하므로 청의 사정이 매우 딱하다는 취지의 말을 덧붙였다.

검찰국장의 보고에 따라 황산덕 법무부 장관과 서종철 국방부 장관 사이에 장시간의 통화가 이루어진 며칠 뒤에야 비로소 국방부 법무관리담당관의 양해를 얻어 나는 비로소 성동지청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비상군법회의 검찰관의 직책을 지닌 채였다.

검찰국장과의 면담 시, 몸이 불편한 그 검사가 누구냐고 반문하시더니 즉시 검찰과장을 불러 그 검사를 이번 인사에서는 한가한 지방검찰청으로 발령하라고 지시하셨다. 그 결과, 서울과 멀리 떨어진 지방의 검사로 임관된 후 지방을 전전하다가 모처럼 서울로 발령되어 성동지청에서 근무하였던 그는 내가 검찰 제3과 검사로 발령받던 때, 검찰국장의 지시에 따라 청주지방검찰청으로 전보되었다.

 

주기적으로 서울의 병원에서 주치의의 검진과 치료를 받아야 했던 그는 마땅한 의사도 구할 수 없는 지방에서 신병 치료를 위하여 서울을 오르내리며 5년간이나 지방 근무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자신의 사정만을 말하면 족한 것을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거린 탓에 이런 결과가 벌어진 것이다.

『자허원군성유심문』에 적혀 있는 도움이 되지 않을 말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의 ‘무익지언망망설(無益之言莫妄說)’이란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중히 생각하지 않고 무심코 내뱉은 나의 경망스러운 말에 한 사람의 인생행로가 크게 바뀌게 된 것이다.

이 검사는 나의 대학교 동기 동창생으로서 나보다 6개월 먼저 제16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던 검사였다. 먼 훗날 그는 부산지방검찰청의 제2 차장검사로, 나는 제1 차장검사로 함께 근무하게 되었으며, 내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부터 대검찰청 차장검사로 승진할 때, 그는 인천지방검찰청의 검사장직을 끝으로 검찰을 떠났다.

그와 함께 부산에 근무하던 시절, 그는 내 덕으로 지방의 검찰청에 내려가 좀 더 편안한 생활을 하여 그의 지병을 완전히 고쳤다고 하면서 오히려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으나, 나는 오랜 기간 그에 대하여 큰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문민정부의 마지막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었던 그는 내가 법무부 장관이 아닌 법제처장임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며 나에게 각별한 관심으로 세심한 배려를 해 주었던 잊지 못할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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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그리스도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감리교회 장로 중의 장로인 독실한 기독교 신자, 그 사람은 문종수(文鍾洙) 검사였다.

 

나의 성동지청 재직 시절의 지청장은 김용린(金用璘), 정명래(鄭明來) 두 분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작고하신 인자한 김 지청장님의 명복을 기원하며, 위 인사 발령 후 2년 4개월 뒤에 내가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로 발령받았을 때, 본청의 차장검사로 재직하시면서 나를 지도해 주신 정 선배님께 경의를 표한다.

여담(餘談) 하나를 여기에 남긴다.

 

내가 성동지청에 근무할 당시 강남 개발의 열풍이 일기 시작하였는데 현재의 강남구와 성남시가 이 성동지청의 관할구역이었다. 그 강남구 전체가 도시계획구역으로 지정되어 대규모 시가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던 검사들은 이를 눈여겨보고 여유 자금을 마련하여 부동산의 소유자가 되기도 했다.

당시 테헤란로의 대로에 접한 땅의 평당 가격은 3만 원 정도였다. 그때의 검사 월급이 5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므로 현재 평당 몇 억 원을 호가하는 이 땅의 가격이 지금으로는 몇 백만 원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형님의 사업 자금에 보태려고 담보로 제공해 주었던 조그마한 집 한 채마저 날려 버린 어린 검사로서는 이런 땅이 그림의 떡이었을 뿐, 장래성은 분명히 있어 보였으나 한 평의 땅을 살 돈도 없었다.

제주도에서 의사로서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였던 둘째 형님께서 이 부동산 붐에 편승하여 적당한 땅을 사겠다고 하시기에 지금 한국전력공사가 소유하였다가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넘어간 땅 부근에 400평 정도의 땅을 물색하여 마련해 드린 적이 있었다.

 

이 땅과 함께 내가 성동구 구의동에 마련하였던 20평 남짓한 주택이 사업을 벌이던 셋째 형님의 사업 자금 대출을 위한 담보로 제공되는 바람에 남의 손에 넘어가면서 온 집안에 큰 파란이 일어났다. 공직 생활이 피곤한 가운데 사생활 역시 어렵고 힘든 기간이었다.

 

성동지청 재직 기간 중인 1975년 7월 7일 나의 아들인 송석윤이 태어났으나, 나는 집 한 칸 없는 신세로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장모님께서 살던 집으로 임시로 이사하여 살 수밖에 없는 딱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이미 고인이 된 나의 셋째 형님께 지금 말씀드리라면 『자허원군성유심문』에 들어 있는 열 글자를 일러 드리고 싶다.


욕심이 많으면 근심이 생기고, 많이 탐하면 화를 불러온다는 뜻의 ‘우생어다욕(憂生於多慾) 화생어다탐(禍生於多貪)’, 바로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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