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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신과 함께

[법의 신과 함께] 법원에는 왜 울분이 쌓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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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들은 지난 9일 발생한 대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상하지도 못한 끔찍한 일이라서일까? 아니다.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 기어코 일어났기 때문이다. 송무를 주로 담당하는 변호사들이라면 의뢰인 또는 상대방으로부터 험한 소리를 들어보지 않은 경험이 오히려 드물 것이다. 필자만 하더라도 재판을 마치고 나와서 상대방 당사자가 품 안의 회칼을 꺼내어 보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번 사건 이후 변호사들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외치고 있다. 변호사에 대한 가해행위를 가중처벌하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과연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방화 테러범이 자신의 행동이 처벌받는다는 것을 몰랐을까?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 처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순히 처벌을 강화하는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근본적인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재판을 받으면서 마음속에 울분을 가득 쌓은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고,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억울하고 분해할까. 재판에서 졌기 때문일까? 아니다. 재판이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노하고 좌절한다.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판사가 설명도 해주지 않고 말할 기회도 안 준다'는 것이다.

 

판사에게 쌓아둔 이야기 하려니

몇 마디 듣지 않고 말을 자르고

소액사건이라 판결 이유도 몰라


재판을 받는 당사자의 눈높이에서 생각해 보자. 소장을 접수하고 몇 달을 기다려 겨우 재판날짜가 잡혔다. 그동안 쌓아둔 이야기를 판사에게 하려고 하니, 판사는 몇마디도 듣지 않고 말을 자른다. 할 말이 있으면 적어서 내란다. 다시 몇 달이 지나 증인신문을 하는데 증인이 거짓말을 한다. 꼭 판사에게 알려야겠다 싶어서 "판사님 저건 거짓말입니다"라고 하니 오히려 조용히 하라는 핀잔을 듣는다. 판사는 내편이 아닌 것 같다. 이미 산더미 같은 자료를 제출했는데 판사는 자꾸 "더 낼 증거는 없는지" 묻는다. 판사가 사실조회를 신청하라고 하는데 그게 뭔지 설명도 안해 준다. 전자소송 사이트는 알아듣지 못할 말로 가득하다. 결국 일년이 훌쩍 지나 판결문을 받았다. 패소 판결이다. 3천만 원도 안되는 '소액' 사건이라서 판결 이유는 생략한다고 한다. 억장이 무너진다.

하필이면 불성실한 판사를 만나 겪게 되는 불운한 상황일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소액재판부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일이다. 소액재판을 예로 들었지만 합의부 사건도 본질적인 문제는 같다. 효율적인 재판 진행을 위해 많은 것을 생략한다. 법정에서 구술로 변론하지 않고 사전에 제출한 준비서면으로 변론을 대체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비정상이다. 그러나 대부분, 아니 모든 재판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비정상이 정상을 몰아내버렸다. 준비서면을 제출하지 않고 구술로 변론하려 하면 오히려 판사로부터 핀잔을 듣는 것이 현실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일단 판사의 수에 비해 사건이 너무 많다. 판사 1인당 사건수가 독일의 5배, 프랑스의 2배, 일본의 3배가 넘는다. 속전속결로 사건을 쳐내야 하다보니 당사자의 말을 들어줄 여유가 없다. 당사자가 자꾸만 하소연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면 표정과 말투에서 짜증도 묻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판사의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일반 국민들과 변호사들은 물론이고 판사들 조차도 판사의 수를 늘리는 것에 찬성하고 있다. 지난해 판사들을 상대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89%가 법관 증원에 동의했다. 그런데 판사 수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판사는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급하다고 해서 판사를 2배, 3배 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2배, 3배를 늘린다고 해서 기존의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5분 재판이 10분, 15분 재판으로 바뀔 뿐이다. 여전히 충실한 재판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소송 제도 자체의 변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변론기일에 앞서 증거조사를 끝마치게 하는 미국식 '증거개시제도'의 도입은 이런저런 사실조회나 문서제출명령을 위해 공전되는 변론기일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소송비용 부담도 현실화해야 한다. 터무니없는 소송을 제기하거나 부당하게 재판을 지연하면 그로 인해 상대방이 지출한 변호사 비용을 전부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 공정성에 대한 의심을 줄여주는 국민참여재판의 확대도 필요하다.

제도의 미진함을 빌미로 방화범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방화범을 비난하며 동종 범죄를 가중처벌하는 규정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제2, 제3의 비극을 막을 수 없다. 오늘도 법원에는 마음속 깊이 울분을 쌓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법조계는 원인을 잘 알면서도 변화에 소극적이었다. 대한민국 재판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대구의 비극을 계기로 변화의 발걸음이 내딛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류인규 대표변호사 (법무법인 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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