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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 편집인 칼럼

전쟁과 신문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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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원인은 김일성의 야욕이라고 단정하기도 하지만, 그 기원을 1931년 만주사변에서 찾는 주장도 유력하다. 기원이야 어떻든 분단국가 사이에 벌어진 내전은 참혹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은 순식간에 서울을 함락하고 대구까지 밀고 내려갔다. 미군이 중심이 된 유엔군이 개입하고서야 전기를 마련했다.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진했고, 압록강에 다다른 11월 초에는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 확신했다. 그때 중국군이 혹독한 추위의 겨울과 함께 반격했다. 장진호 계곡에 진출해 있던 미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사의 철수 작전이 펼쳐졌다. 12월 1일에는 평양을 탈출하기로 결정했고, 1만 톤의 물자는 고스란히 중국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북쪽의 전황을 모른 채 서울에서는 들뜬 분위기 아래 국토통일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그 혼란의 도가니에서 법률신문이 창간되었다. 어떻게 전쟁 중에 새로운 신문이, 그것도 법조계의 전문지가 탄생했는가? 전란의 포화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었다. 국민의 일상을 유지하게 할 기능의 일부로 사법제도의 톱니바퀴는 돌아야 했고, 법률전문지도 필요했다. 포성이 휩쓴 폐허에 희망의 싹 하나를 틔우리라는 열정의 결과가 신문의 발행이었다. 극심한 혼돈 속에서 질서를 꿈꾼 것이 창간의 의지였다. 12월 1일 창간일의 전장 사정을 정확히 알았거나, 창간을 새해로 한 달만 늦추었어도 그때 법률신문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해 1월 4일에는 국민이나 정부나 다시 서울을 떠나야 했다. 운명적 탄생이었다.

 

한국 전쟁 중 창간한 법률신문
지금도 상황은 여전히 전쟁 중
전쟁 중 창간의 용기 발휘하듯
심기일전으로 독자 기대 부응


1946년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지니며 출발한 월간지 <법정>에 관여하던 변호사들이 나서 돛을 단 법률신문이었기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수주의와 반공주의에 젖어 들며 성장했다. 전화 속에 핀 수많은 꽃 중의 하나였던 신문은 어느덧 꽤 큰 나무가 되었다. 4년 먼저 태어난 월간지는 30년도 못 넘기고 사라졌지만 법률신문은 72년째를 맞는 동안 매주 한두 차례 발행하여 5000호를 눈앞에 두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의도한 공도 예상하지 못한 과도 있었다. 이 사회에 법률문화라는 영역을 구축하는 데 일조를 한 반면, 수구적이고 권위적인 법조계의 이익과 유지를 위한 기여도 했다.

이제 기원의 기원을 마련해야 할 시점에 섰다. 법률신문의 자각이다. 한국 법조계를 위한 최소한의 소극적 역할은 무난했으나, 미래의 요청에 부응하는 바람직한 사법제도의 개혁에 적극성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성찰이 없을 수 없다. 법률신문의 재탄생이다. 바깥을 바꾸기 전에 스스로 먼저 변화를 시도하여 이렇게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물론 판형과 활자를 키운다고 갑자기 언론의 거목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징성은 충분하다. 내부의 은근한 각오를 보여주기에도 적절하다.

지금도 여전히 전쟁 상황이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이며, 남북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거기서 비롯한 두 개의 이념은 기묘하게 변형되어 정치와 사회 문화 전반을 전쟁터 삼아 대립한다. 시대의 물결도 거세어 문자제국이 흔들린 지 오래고, 인쇄 매체의 운명은 경각에 달렸다. 그래도 새 마음들은 전쟁 속의 창간이라는 용기를 다시 발휘하듯 인터넷과 유튜브 홍수 사이에 종이 신문을 내민다. 심기일전한 법률신문 구성원들의 큰 포부가 독자와 사회의 작은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를 조심스럽게 희망한다.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공동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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