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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민사소송법 산책 ⑦ 로마법에서의 인간성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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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manitas

인간성(humanitas)이라는 단어는 로마 독자의 창조물이다. 이에 상당하는 그리스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한니발을 격파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자로서 기원전 147년에 집정관을 역임하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일명 소(小)스키리오의 개인 살롱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소 스키피오는 어려서부터 스토아적 생활신조를 지키고 학예를 장려하여 로마의 헬레니즘 화에 기여한 공이 크다. 그러나 기원전 146년에 3차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켜 한줌의 흙으로 만들었다.

이 신조어(新造語)에 의하여 인간 인격의 존엄성·숭고성이라고 하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을 지상의 다른 일체 피조물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성 사상은, 처음에는 귀한 것으로서 교양이 높은 사람들이 모이는 조그마한 살롱의 독점물이었는데, 공화정시대에 벌써 광범하게 사람들이 사용하였다. 이 인간성 사상의 조류는, 제정(帝政)시대에도 일체 역류(逆流)하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넓게 펴져서, 결국에는 기독교의 교리(敎理)와 합류하게 된다.


2. 로마법에 준 영향

인간성 사상이 로마의 법 생활에 준 영향은 실로 막대하여 이것을 일일이 다 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형태는 공중에 뿌리는 유토피아적인 그리스인의 사색과는 차원이 다르며, 로마인답게 실제적인 형태를 취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핀다.

(1) 사형(死刑)의 억제

12표 법에서의 형벌은 단순히 1개, 즉 사형만 있었다. 그러나 12표 법 편찬자의 기본적 물건에 대한 특징적인 사고의 방향을 잘 보인 것은, 절도의 취급이다. 그들은 수확물의 절도만을 사형에 의하여 처벌하였다. 그 이외의 절도피해자는, 절도범이 손에 무기를 들고 자기 방어를 한 경우 혹은 야간에 절도한 경우에 한해서 그 현행범을 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현행 절도범은 절도피해자에게 그 신체를 인도하였고, 비(非)현행절도범은 벌금형에 처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인간성의 표현이다. 독일에서도 절도에 관한 형벌은 18세기에 들어서기까지 한마디로 사형이었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이 로마법의 영향을 받아 1743년에 인간성 운동을 하면서 비로소 폐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12표법 이후의 시대에서도 사형을 현저하게 억제하였는데 이 동향은 기원전 2세기 이후 명백하게 인간성 사상을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사형이 적용된 것은 살인·국사범죄에 한정되었다. 더욱 이 경우에도 그 적용례는 매우 적었다.확실히 사형은 로마 제정 초기에 다시 표면에 나타나지만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들의 치정 하에서, 사형은 사실상 예외적 상태였다.

(2) 죄를 범한 자만 처벌한다는 원칙

이것도 인간성의 부호(符號)이다. 로마에서는 아버지의 죄업(罪業)에 아들을 연좌(緣坐)시킨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아니 하였다. 그들은 로마인이라면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자존심을 과시하고, 이 원칙에 언급하였는데 이 법원칙은 그리스인도 알지 못하였다. 티벨리우스가 세냐야누스의 아들을 처형한 것, 네로가 모반인의 아들을 처벌한 것은 부정행위에 관한 것으로서 사법(司法)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범죄를 범한 자의 상속인은, 그 범죄의 결과 취득한 물건의 반환에 관해서 사법상 책임을 부담하지만 피상속인에게 과해진 벌금에 관한 책임을 부담하는 것은 범죄자인 피상속인이 생명이 남아 있는 동안에 소송이 제기된 경우에 한정하였다. 물론 이 원칙에는 예외가 있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3) 고문의 금지

로마인의 인간성을 가장 특징짓는 것은, 이유 없이 간단하게 고문을 자행하는 고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유인에 대한 고문을 금지하였다는 데 있다. 로마법을 공부하던 모든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처음에는 이것이 과연 진실인지 의문을 품다가 나중에 이를 확인하고 감격하여 로마법에 심취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점은 로마인을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할 것이다. 키케로도 아테네인이나 로도스 섬에서는 '극도로 가혹하게, 자유인이나 시민이라도 고문을 받는다'고 단언하였다. 공화정시대 전체를 통하여 이 로마의 원리가 손상된 사례를 증명할 수 없다. 이 사실은 로마법 영광의 첫 번째이다.

(4) 외국인의 처우

외국인의 처우에 있어서 '로마인의 관대'는 기원전 2세기 이후 가장 일반적인 관용구였다. 로마인은 복수심에 불타지 아니하고, 무엇보다도 경제에 집착하며, 목적의지에 투철한 제국주의자였다. 패배한 적을 무조건 근절시키는 것, 주민을 살육하는 것, 혹은 노예로서 매각하는 것, 주거를 도괴시켜 불태우는 것 같은 그리스나 오리엔트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이런 것들은, 로마인들의 성격에 부합하지 아니하였다. 일단 승리를 얻은 후에는 토지나 사람들을 로마제국의 조립하는 데에 기울이는 노력을 하였다. 외국인은, 사실상이냐 법률상이냐를 묻지 않고, 그들의 토지·그들의 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5) 노예법

인간성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 혹은 적어도 주인권을 제한하고, 노예의 지위를 자유인노동자의 지위에 가깝게 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 요청은 고대의 인간성 운동에서는 현저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물론, 우리들은 4세기 소피스트들의 '신은 모든 것을 해방하였다. 신은 노예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창조하지 아니하였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조차 여기에 시비를 걸면서, 노예제도를 국가 생활의 필수품이라고 평가하였다. 초기·중기의 스토아학파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하여 노예제도를 옹호하였다.

실제로 공화정시대에서 노예의 법적 상황은 거의 본질적으로 변하지 아니하였다. 확실히 노예는 옛날로부터 물건(res)의 개념에 속한다고 고려하였다. 그러나 이것에 의하여 의도된 것은, 물건에 대하여 적용되는 어느 일정한 법원칙이 노예에 대해서도 모두 적용된다는 것이 아니었다. 즉, 노예의 인격은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2표 법은 노예의 상해를 물건의 파괴가 아니라, 신체상해로 취급하였다. 로마인은 법적 노예를 동물과 동일하게 취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노예에게는 사법상 권리능력이 결여되어 고유의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예는 사법상의 위법행위 뿐 아니라 공법상의 위법행위에 관해서도 불법행위능력을 갖고, 공적 형사절차에도 복종하였다. 노예는 명백하게 로마 건국 무렵부터 행위능력을 가졌다. 노예는 혼인능력이 없지만 상속법에서는 상속인으로서 지정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노예는 자기 주인에 의한 권한부여가 있어야 비로소 상속재산을 승계할 수 있고 이에 의하여 주인이 상속인의 법적지위를 취득한다. 그러나 이를 위하여 노예 자신의 취득행위는 필요한 것으로서, 이를 노예에 가름하여 주인이 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상속재산을 수령하기 이전에 노예가 사망하면 주인은 그 상속재산을 취득할 수 없었다.

제정시대에 인간성은 노예 문제에 있어서 강력하게 전진하였다. 노예제의 폐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노예의 경우에도 인간성에 적합한 형성을 특히 강조하는 주장을 한 것은 세네카의 공적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 세네카를 추종하였다. 기독교는, 이 교설을 수계하였으나, 여기에 하등 새로운 것을 부가하지 아니하였고, 특히 고대의 기독교에서는 심지어 예수조차 한 번도 노예제의 폐지를 명시적으로 주장한 일이 없었다. 반면 로마에서는 2세기 이후에는 노예의 수가 감소되어 노예제도가 점차 경제적 의의를 상실하자 법의 영역에서 몇 가지 진전을 이루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노령 혹은 질병으로 인하여 축출된 노예는 자유인으로서 이러한 노예를 살해하는 것은 살인이라고 선언하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전혀 이유가 되지 않는 이유로 여성 노예에게 잔혹한 고통을 준 부녀자를 추방형에 처하였고, 주인이 노예를 살해하는 것을 금지하고 처벌을 하려면 그 노예를 재판관에게 인도할 것을 명하였다. 또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남 노예 혹은 여 노예를 이유 없이 매춘업자 혹은 검투사업자에게 매각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여러 차례 비인간적 노예의 처우에 간섭하고, 이런 처우를 받는 노예에 관하여 속주장관에 의한 매각을 명령하였다. 또 그는, 주인에 의한 노예 살해는, 타인의 노예살해와 마찬가지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예살해는, 기독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이르러 살인이라는 개념 속에 들어갔다. 그 밖의 점에서는 노예의 법적 상태에 큰 변화가 없었다.


강현중 변호사 (법무법인 에이펙스·전 사법정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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