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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FEEL談

[지방FEEL談] 모명재에서 고모령을 넘어 고모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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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구 만촌동 남부정류장 뒤 야트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모명재(慕明齋)가 있다. 모명재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온 이여송 장군의 일급참모였던 풍수전략가 두사충을 모신 재실이다. '모명(慕明)'은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두사충의 호다. 두사충은 왜군이 재침한 정유재란 때도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전쟁이 끝난 후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하였다. 모명재 기둥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에게 보낸 시가 걸려있다.

두사충은 명의 원군이 조선 관군과 합동작전을 펼칠 때 조선군과 긴밀한 협의를 하였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그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충무공은 명나라 장수로서 수만리 먼길을 마다않고 두 번씩이나 조선을 찾아와 도와준 두사충에게 감격하여 한시를 지어 보내 마음을 표했고 그 한시가 모명재 기둥에 지금도 새겨져 있는 것이다.

모명재에서 두사충의 묘를 지나 산길을 조금 걸어가면 형봉과 제봉을 지나 고모령으로 넘어가는 길 표지판이 서있다. 모명재를 들릴 때마다 형제봉을 넘어 고모령을 지나 고모역까지 가는 코스를 한번 걸어보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지난 토요일 마침내 그 등산길을 걸을 수 있었다. 모명재에서 올라가는 형봉은 야산이지만 경사가 가팔라 형봉 정상에 오르니 온 몸에 땀이 묻어나왔다. 형봉 정상 건강쉼터에는 체육시설이 있는데 그곳에서 군기지 철조망을 따라 내려가지 않고 명복공원 뒤에 있는 천태종 사찰 동대사로 내려왔다. 동대사 앞마당 저편에 저수지가 있고 그 근처 천막을 쳐놓은 평상에 잠시 앉아 시원한 산들바람을 쐬다가 일어나 고모령으로 향했다.

고모령은 현인이 불렀던 전통가요 '비내리는 고모령'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찾는 사람이 별로 없이 수풀로 그늘져 있어 생각을 비우고 혼자 조용히 걷기 적당한 곳이다. 고모(顧母)는 한자로 돌아볼 고(顧), 어미 모(母)다. 한자 뜻대로 하면 어머니를 돌아본다는 것이다. 현인의 '비내리는 고모령'은 일제강점기 고향을 등지고 징병·징용에 끌려가야 했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그 당시 대 히트를 쳤다. 그 노래는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로 시작된다. 나라 잃은 젊은이들이 일제의 태평양 전쟁에 동원되어 끌려가면서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 서럽게 울어야 했던 한맺힌 애절한 가사로 구성되어 있다.

고모령 호젓한 산길을 지나 마을로 내려오면 고모역이 나타난다. 고모역은 현재는 폐역으로 기차가 서지 않는 곳이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대구역과 경산역 사이에 놓여있어 징병·징용에 끌려가던 청년들의 집합소였다. 일제는 사람이 많이 붐비는 대구역을 피해 조금 한적한 고모역에 징병·징용을 가는 사람들을 집합시켜 기차에 태워 부산으로 보냈다.

고모역 인근 경산 남산면 대왕산에는 '대왕산 죽창의거비'가 세워져 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여름 강제징병·징용에 항거하여 경산지역 청년 29명이 죽창과 낫 등으로 무장하여 약 20일간 대왕산 일대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소규모 독립운동을 벌였다. 세차례의 전투 끝에 식량이 고갈되자 모두 체포되어 2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광복을 못본 채 옥사하였고 나머지 27명은 광복 전후에 풀려났다. 대왕산 죽창의거는 일제가 강제 징병·징용을 했다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고모역은 현재 문화공간으로 바뀌어 시인이자 역사가인 설준원 고모역 문화원장이 옛 고모역의 역사와 현인의 '비내리는 고모령'에 얽힌 자료를 폐역 건물 내에 전시하고 있다. 고모역 맞은편 마을에는 고모상회가 있고 그 옆에 일흥마트가 있다. 일흥마트 창문 밖 오래된 탁자에 앉아 후배와 김치를 안주로 막걸리를 시켜 마셨다. 유튜브에서 흘러나오는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를 들으면서 행여나 비라도 내리려나 했는데 비는 오지 않고 고모역을 지나쳐 달리는 기차소리만 요란하다. 마을 담장 위에는 그 옛날 고모령과 고모역의 슬픈 애환을 말해주듯 장미만이 하늘 아래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박헌경 변호사 (대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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