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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언

정의의 여신이 칼과 저울을 거둔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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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본 영화의 여운이 길게 남을 때가 있다. 내게는 영화 '칠드런 액트(The Children Act·2018)'가 그렇다. 백혈병으로 죽음을 문턱에 둔 17세 소년 아담 헨리. 그와 그의 부모는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한다. 병원은 소년에 대한 수혈 허가를 법원에 청구하고 영국 고등법원 가사부 판사인 피오나 메이(엠마 톰슨 분)는 소년의 생사가 달린 사건을 맡는다. 명망 있는 판사지만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평탄치 않은 피오나는 급히 심문 준비를 시작한다(이하 줄거리 결말 포함).


피오나는 병원을 직접 방문해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담을 심문한다. 곁에 있어 달라는 아담의 요청에 피오나는 잠시 법원으로의 복귀를 미루고 아담이 치는 기타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소년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돈다. 피오나는 자신 있게 법리를 선언하며 소년의 수혈을 허가하는 판결을 선고한다.

피오나의 판결로 새 삶을 시작한 아담. 그는 피오나에게 의지하기 시작한다. 세계 일주를 함께하자는 자신의 공상을 메시지로 남기고 불쑥 피오나를 찾아와 자신이 쓴 편지와 시를 건네기도 한다. 당황한 피오나는 "네 사건은 끝났어. 나한테는 다른 아이들의 안타까운 사건들이 많단다"라고 말하며 아담을 떼어낸다. 그 후에도 아담은 피오나의 출장지까지 쫓아와 함께 살고 싶다고 애절하게 매달리지만 피오나는 돌려보낸다.

병이 재발한 아담이 또다시 수혈을 거부하고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은 피오나. 그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 아담에게 삶의 희망을 일깨워 보지만 핏기 하나 없는 아담이 간신히 입을 뗀다. "판사님, 제 선택이에요." 다 끝난 사건의 당사자이자 성년이 된 아담에게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는 피오나는 오열한다.

영화 속 아담은 한 사람의 인생에 법과 판결이 해 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보여준다. 아담은 법원의 판결로 생명을 유지했지만 판결 이후의 삶에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영화는 그것을 피오나와 그의 남편과의 관계에서 찾은 듯하다. 파탄의 위기를 겪었지만 남편 잭은 아담 사건으로 무너져 내린 피오나 옆에서 손을 꼭 잡아주고 그가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 주었다. 잭의 손과 어깨는 공감과 사랑일 것이다. 신앙의 고수에 집착했던 소년 아담, 법리 추구에 천착한 판사 피오나. 재판을 받으며 또 판결을 내리며 그들은 강해 보였지만 실은 연약한 존재였고 필요한 것도 같았다. 정의의 여신이 칼과 저울을 거둔 후에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과 어깨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진웅 부장판사 (서울서부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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