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주목이사람

[주목이사람] '민법의 비문' 펴낸 언어학자, 김세중 전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민법의 비문은 일본민법 축자(逐字) 번역한 결과”

177850.jpg

 

"법조인의 모든 직업적 행위는 말과 글, 즉 언어로 이뤄집니다. 판결문도 공소장도 준비서면도 모두 글로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언어는 기본적으로 문법에 토대를 두고 있고, 문법을 지켜야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명제인데 현실에서 잘 지켜지지가 않습니다. 문법도 어떻게 보면 법이고 규범인데 말입니다."

최근 '민법의 비문(두바퀴출판사 펴냄)'을 출간한 언어학자 김세중(사진) 박사의 말이다.

김 박사는 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언어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9년 국어연구소에 들어가 2015년까지 국립국어원에서 26년간 학예연구관으로 일했다. 퇴직 후 본격적인 저술작업에 들어간 그는 2017년 신문 사설 속 비문을 분석한 '품격있는 글쓰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러다 신문 문장보다 더 우리 생활에 중요하고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법조문 연구 쪽으로 기울었다. 그 중 특히 민법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법이야말로 우리 생활에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중에 몸통이 되는 것이 민법이라고 하더군요. 민법은 인간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기본적인 관계를 다 다루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민법을 들여다 봤습니다. 그러다 민법전의 여러 비문들을 발견했고, 민법의 크나 큰 중요성에 비춰 비문들이 너무 치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책까지 짓게 됐습니다. 물론 이 책은 법률용어가 어떠한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법조인과 법학자들의 몫입니다. 저는 다만 '틀린문장'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법률용어가 쉽냐 아니냐, 적절하냐 부적절하냐 하는 것은 법학자들간 다툼이 있을수 있지만 문법적으로 틀린 것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틀린 것이지요."


일본 문장 기계적으로 번역

 200여개 산재

 

그는 현행 민법에 비문이 200여개가 넘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원인을 일본 민법전을 기계적으로 '축자(逐字, 글자를 하나 하나 따름) 번역'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민법에 비문이 생겨난 것은 당시 국어생활의 반영이라기보다 일본 민법을 축자 번역한 결과입니다. 민법은 1954년 국회에 제출돼 1958년 공포 됐습니다.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48년 건국 직후입니다. 즉 민법 조문은 19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초반에 걸쳐 작성된 문장입니다. 그런데 당시 민법을 기초하신 분들이 어떤 분들이냐면 1920~30년대 일제시대에 공부했던 분들입니다. 또 의용민법을 쓰지 않았습니까. 옆에 일본 민법전을 두고 작업을 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대조해보면 일본 민법과 똑같은 조항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게 일본어 문장을 한국어 문장으로 옮기면서, 옮긴 문장이 한국어 문법에 맞아야 하는데 이 분들이 기계적으로 대응하는 의미로 바꿔버리는 과정에서 비문이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면 민법에 수없이 나오는 '~에 위반하여'와 같은 문구는 '~을 위반하여'가 문법상 맞습니다. 또 민법에서 가장 중요한 조문이라고 할수 있는 제2조 신의칙 규정에도 '신의에 좇아'라는 문구가 있는데 일본 민법에 '信義に從'를 단순히 기계적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역시 축자 번역입니다. '좇다'라는 것은 타동사이기 때문에 '부귀영화를 좇아', '명예를 좇아' 이렇게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從'을 우리말 '좇아'로 번역하면서 조사를 바꾸지 않고 일본어 조사인 'に'를 '~에'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수두룩하게 남아있습니다."


‘~에 위반하여’는 

‘~을 위반하여’로 고쳐야  


김 박사는 축자번역의 문제 외에도 △주어와 목적어가 누락된 경우 △조사를 잘못 쓴 경우 △동사에 맞지 않는 보어를 쓴 경우 △문맥에 맞지 않는 시제어미를 쓴 경우 등 여러가지 형태의 비문들이 민법전에서 발견된다고 했다.

"민법 제77조 2항을 보면 '사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고 돼 있는데 이 역시 비문입니다. '~거나'라는 것은 접속어미로 동사구는 동사구와, 명사구는 명사구와 접속돼야 하는데 해당 조문에서 '사원이 없게 되거나'는 동사구이므로 뒤의 '총회의 결의로도'라는 명사구와 호응할 수 없습니다. 이는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에서 해산을 결의한 경우에도 해산한다'라고 고쳐야 합니다. 참 있을 수가 없는 문장들입니다. 단지 읽고 뜻을 짐작할수 있다는 것만으로 넘어가버린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고쳐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법의 문장은 완벽하고 정확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법조인들에게는 '~에 위반하여'가 익숙할 수 있지만 영어에서도 전치사를 경우에 따라 'in, for, at' 따위를 쓰지 않습니까. 이건 관습이고 약속이고 규범인 것입니다. 비문인 조문들은 이걸 어기고 다른 전치사를 쓴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비문인 법조문을 반드시 수정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시에 합격한 지 50년이 넘으신 어느 원로 법조인께서 최근에 와서야 어떤 조문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됐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 정도로 법률문장, 법조문들이 너무 어렵습니다. 비문이 수정된다면 당장 법조인들 스스로가 편해지지 않을까요. 로스쿨생이나 법대생같이 법조인이 되려고 하는 분들한테서도 법조문이 어려워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들었습니다. 문법적으로 쓰여있어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심지어 비문이 많으니 더욱 이해하기 어려울테지요. 일단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편리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법조인이 되신 분들, 실무에서 법을 다루는 분들도 편해질 것입니다. 또한 법이라는 게 법조인만을 위한 것이 아닌 만큼, 비문이 바로 잡힌다면 많은 사람들의 접근이 조금이나마 용이해질거라 생각합니다."

김 박사는 끝으로 "요즘 우리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다,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며 자부하지만 국민생활의 기본인 민법이 이렇게 일본 민법의 축자 번역이라는 것은 국격과 거리가 있는 부끄러운 현실"이라며 "부디 법조계와 입법부 등 관계기관이 현실을 바로 인식하고 개선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