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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의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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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의 선거

로마공화정은 '권위'의 원로원, '직권'의 정무관, '자유'의 민회가 정립(鼎立)한 터전 위에 성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선거는 오로지 민회에서만 행하여졌다. 민회는 수십 명의 정무관을 선거로 매년 선출하였기 때문이다. 원로원의원은 지명에 의해서 선출되고 또 종신직이므로 선거는 없었고, 민회는 명목상 시민 전원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민회원 선거는 없고 집정관 등 정무관만 선거하였다. 정무관선거도 처음에는 전임 정무관이 후임으로 지명한 후보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의식(儀式)에 불과하여 선거란 것은 이름뿐이었다. 그런데 공화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정무관직에 취임하여 개인의 경력을 빛냄과 동시에 집안의 이름도 높이겠다고 생각하는 인물의 수가, 소정의 정무관의 자리를 훨씬 넘어서면서 과거 평화적인 축제의 선거시대는 끝이 나고, 치열한 선거전이 이루어졌다. 대립의 패턴으로는, 그렇게 많지 않은 수의 이른바 명가(名家) 사이의 패권다툼이 되거나, 구 귀족과 신흥 귀족의 다툼이 되었다. 그 후 로마의 유력한 귀족층이 벌족(閥族)파와 민중파로 분열되어 원로원의 옛 지도체제를 견지하려고 하는 보수적인 전자와 그리스의 아테네 적 민주정치의 모습도 다소 염두에 두면서, 민회를 세력 기반으로 삼아 그곳을 무대로 정치를 변하게 하는 다소 혁신적인 후자가 상당히 대립하는 사태가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생겼다. 거기에 제3세력·제3계층인 기사계급(귀족도 평민도 아닌 중간 그룹)의 엘리트 들이 정치세계에 참가함에 따라 그 엘리트집단과 그들 사이에 경쟁이 생겼고, 또한 군사적 실력자가 그 힘을 그대로 드러내고 이른바엘리트집단에 대항하여 선거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 결과 공화정이 끝나면 매년 거행된 선거는 로마 정치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대 이벤트로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공화정시대가 지나고 제정(帝政) 초기에 들어서면 강력한 황제의 힘 앞에 지금은 단지 명예직이 되어버린 정무관은, 황제의 뜻대로 선출되었다. 물론 참된 의미에서 선거가 행해진 것은 공화정 중기 이후의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경쟁원리가 없어진 후대의 현상을 여기에 비할 수 없다.


2. 로마의 선거방식

로마의 선거방식을 알려면 시민의 모임인 민회와 평민회를 먼저 알고 여기에서의 선거방식을 살펴야 한다.

(1) 시민의 집회·민회·평민회

시민은 임의로 또는 정무관의 소집에 의하여 시의 중앙시장에 모인다. 이 집회(concio)에서, 정무관은, 그 고시나 원로원의결을 발표하고, 법안이나 정무관 후보자, 범죄사실을 시민에게 알려서 시민의 이해를 구하고, 전선에서 귀환한 사절은 전황을 보고하였다. 또한, 이 시민의 모임 앞에서 보조관리나 공적 노예에 대한 형을 집행하고, 경매절차를 진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시민이 법률을 제정하거나 또는 정무관을 선거하기 위한 모임인 민회(comitia)는 권한 있는 정무관이 소집하여 주재하여야 하고, 시민들이 마음대로 민회를 성립시킬 수 없었다. 시민은 단순한 집회(concio)에서는 표결권을 행사할 수 없고, 법안의 의결·정무관의 선거는 꼭 민회(comitia)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시민은 개별적으로 민회에 참석할 수 없고, 그가 속한 특정 단체를 단위로 하여 참석하며, 그 단체를 단위로 표결권을 행사하였다.

민회는 이러한 집회 및 표결의 단위를 이룬 단체의 구별에 따라서 쿠리아 민회(comitia curiata,또는 귀족회), 겐투리아 민회[c centuriata,또는 병원회(兵員會)] 및 트리브스 민회[(c tributa) 또는 구민회(區民會)]의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쿠리아 민회는 귀족들이 쿠리아를 단위로 소집되고 이를 단위로 투표하는 민회이고, 겐투리아 민회는 마찬가지로 백인대(cenuria)를 단위로 한 민회이며, 트리브스 민회는 구(tribus)를 단위로 한 민회이다.

이들 각 단위의 의견은 각각 내부에서 다수결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결정되는데 남자로서 성숙자인 시민은 모두 민회에 출석하지만 개별적으로 투표할 수 없고, 그가 속한 단위 내에서만 투표하여 단위 1표를 구성하고 그 단위가 해당 민회의 의사로 되었다. 즉, 민회는 구성원 개개인이 아니라 구성원 단체의 각 단위가 1표를 갖고 있다. 아마 현재로서는 미국에서 유권자 개인이 아니라 주(州)의 대표가 미국 대통령을 선거하는 방식이 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소개한 세 가지 민회는 각각의 역사를 달리하며, 각각 독립하여 발달하여 상호의 관계는 제2의 관습으로 규정되었다. 이런 민회는 시민 전체, 즉 귀족(쿠리아 민회) 또는 귀족 및 평민(겐투리아 및 트리부스 민회)의 집회이고, 정무관에 의하여 소집되었다. 이에 대하여 평민은 평민만으로 집회를 갖고, 이러한 평민회(concillia)는 평민정무관에 의하여 소집, 주재되었다.

(2) 각 종 민회 및 평민회의 관계

각종 민회 및 평민회는, 각 그 구성의 기초를 달리하며 그 발생발달의 경로가 다르다. 그 사이에는 상하의 관계가 아니며, 각자의 관할을 규정하는 입법이 이루어진 적도 없다. 이들 상호의 관계는 차츰 관습적으로 규정되었다. 귀족회인 쿠리아 민회는, 쿠리아 제도의 소멸·귀족과 평민의 융합으로 통치적 의의를 상실하고, 형식적 존재로 되었다. 반면 겐트리아 민회는 점차 그 지위를 확립하여 최고로 중요한 민회가 되었고, 다음 세대에는 최상급 또는 정당한 민회라고 부르게 되었고, 정무관의 선거를 위한 집정관의 소집 및 후보자 제안에 의하여 정무관을 선출하였다. 평민회는 평민정무관에 의하여 소집되고, 호민관의 소집 및 후보자 제안에 의하여 평민정무관을 선출하였다. 트리부스 민회는 법무관의 소집에 의하여 그 제출하는 후보자 고안(考案)에 의하여 위에서 정한 정무관 이외의 정무관, 및 기원전 362년 이후에는 6인, 기원전 311년 이후는 16인, 뒤에는 24인 전부의 군단장을 선출하였다. 입법에 관해서는, 특히 평민회의결이 민회의 의결인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갖게 되면서부터 3종 회의의 관할이 불명확해졌다. 민회에 제출하는 것이 일상적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집정관이 트리부스 민회에 법안을 제출할 수도 있고, 사법(私法)의 영역에 속하는 법안은 호민관이 평민회에 제출하는 상태가 점차 발달하였다. 집정관의 다수는 군의 지휘를 위해 로마시를 떠날 필요가 있는데 호민관은 시의 경계 내에 있어야 하므로 사법적 규정은 호민관의 제안에 의하여 제정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겐투리아 민회는 정무관의 사형선고에 대한 제소를, 트리부스 민회는 벌금형의 선고에 대한 제소를 수리하고, 전자는 사형에 관한, 후자는 벌금형에 관한 형사재판권을 정무관의 제안에 의하여 행사하였다.

민회소집권자는 고시에 의하여 소집기일 및 그 제안을 고지하고 겐투리아 민회에서는 통상은 30일, 트리부스 민회에서는 3주일(24일)을 경유하며, 전자는 병사들이 모이는 연병장에서, 후자는 시장에 있는 집회소(comitium)에서, 또 때로는 카피톨리움 언덕위에서 소집하였다. 아마 겐투리아 민회가 본래의 군사적 색채를 떠나서 민회의 작용을 영위함에 따라 3주간의 기간은 이 민회에도 적용되었다. 소집에 임하여 정무관은 신의(神意)의 계시(啓示)를 기원하여야 하고, 신의가 이를 명할 때만 회의를 성립시킬 수 있었다. 회의 성립 후에 정무관은 그 제안을 낭독하고, 정무관이 집행관에게 투표의 결과를 낭독하여 보고하면 의결은 성립하였다. 평민회 소집의 고시는 소집일과의 사이에 24일의 기간을 필요로 하더라도 소집에 임하여 신의의 계시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3) 로마의 선거방식

로마의 선거방식은 한 개의 투표단위가 1표를 갖는 관계로 그 단위 가운데서 사표(死票)가 생기는 것은 구조상의 문제로서 이를 흠이라고 말할 수 없으나 그 단위를 구성하는 유권자의 수가 동일하지 않은 것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고로 중요한 민회인 겐트리아 민회는 193의 겐트리아로 이루어졌는데 기사의 겐트리아에서는 '100인대'를 의미하는 겐트리아라는 말이 표시하는 것과 같이 원칙적으로 재산이 많은 100인이 투표에 참가함에 대해서 재산이 없는 최하층의 프로레타리(무산자)의 겐트리아에는 수천명이 참가하여 1표를 구성하였다. 재산의 다소에 의해서 군사적 부담이 다른 것을 반영하여 정치적인 권리에도 강약을 인정한다고 하는 로마인의 생각은 합리적일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보면 시민 1인당 투표가치에 차등이 생기는 것이 명백하여 국민을 평등하게 취급하자는 현대의 시점에서는 비판받을 수도 있다. 같은 문제는 지구(地區)를 베이스로 구성된 트리부스 민회에도 생긴다. 기원전 3세기 후반에는 트리부스의 수가 35까지 증가하였는데 이후 로마가 유럽, 아시아 및 아프리카로 확대되면서 신 트리부스의 신설은 중단되었고, 대량으로 생긴 신 시민은 기존의 트리부스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 때문에 트리브스의 구성원 수에 큰 차이가 생겼다.


3. 선거부정에 대한 취급

로마가 현대에서 보더라도 보다 진보된 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부정선거의 단속규정이 그 일례이다. 기원전 358년에 처음 제정되고, 이어서 기원전 2세기 초부터 기원전 18년의 마지막 법률까지 사이에 10개에 가까운 개정 법률이 나왔다. 이들 법률의 세목은 명백하지 않으나 전체의 방향으로 보면, 이른바 '구성요건'은 확장되고 형벌은 엄해졌다. 가중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특수한 조직을 수족(手足)으로 유권자를 대량으로 매수하고 향응이나 구경거리 개최 등을 통하여 선거 기간 중에 인기 있는 행사를 실행하여, 입후보자에게 사람의 눈을 모으는 공개적인 장을 여는 것이다. 법정형으로서는 당선이 무효가 되는 것 외에 예컨대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10년에 걸쳐 정무관 입후보 자격을 박탈하고, 또는 원로원의원의 명예를 종신 박탈하기도 하고, 또 10년간 이탈리아에서 추방하는 것을 정하기도 하였다.


강현중 변호사 (법무법인 에이펙스·전 사법정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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