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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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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우드론 공동묘지에는 미국의 유일한 황제가 묻혀 있다. 묘비명은 "노턴 1세, 미합중국의 황제이자 멕시코의 보호자". 1859년 스스로 즉위 선언을 하여 1880년 사망하기까지 적어도 샌프란시스코에서만큼은 황제로 군림하였던 조슈아 에이브러햄 노턴(Joshua Abraham Norton)의 묘이다.


낡은 군복을 입고 나타나 황제를 자처하던 몰락한 사업가는 과대망상증 환자로 취급될 법도 했지만, 기성 정치에 염증을 느끼던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황제의 등장에 열광하며 그를 도시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부패와 전쟁에 반대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대통령을 소환하겠다는 허무맹랑한 기행조차 황제의 칙령으로 대서특필되었고, 도시의 식당과 호텔들은 그가 발행한 채권을 대가로 무전취식을 허용하였다.

노턴 1세가 사망한 지 140여 년이 지났지만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여전히 그를 추억하며 기념하고 있다. 노턴 1세의 이름을 딴 술집과 호텔은 지금도 활발하게 영업 중이고, 황제의 코스튬을 차려입은 가이드의 도시 투어도 인기리에 진행되고 있다. 몇 년 전에는 황제의 '진짜 탄생일'이 1818년 2월 4일이라는 연구 결과에 따라 대대적인 탄생 기념행사를 벌이기도 했다니, 노턴 1세에 대한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의 유쾌한 사랑은 한결같아 보인다.

기존 정치에 대한 혐오와 염증은 한국의 대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유력한 대선 후보들은 모두 국회의원 '0선'이고 하나 같이 주류 정치권과의 차별점을 강조하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후보들의 고유한 정치철학이나 정책·공약이 아닌, 자극적으로 생산되고 소모되는 가십성 이슈들인 듯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노턴 1세는 허황된 이상이었을지언정 평화와 평등을 주창하며 시민들의 꿈과 희망을 대변하였다. 하지만 가십성 이슈로 점철된 한국의 대선판에서는 많은 유권자들이 그 미래를 의탁할 만한 후보 찾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선거를 목전에 두고 널리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허구의 존재라도 소환해보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


최윤아 변호사 (법무법인 율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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