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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비리호송(非理好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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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는 소송이 없는 것, 무송(無訟)을 이상적인 사회로 생각하였다. "척지지 말라"는 말도 피고를 가리키는 '척(隻)'에서 유래된 것으로, 소송을 부정적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사회에는 분쟁이 있기 마련, 실제는 동방소송지국이라고 평가될 만큼 많은 소송이 있었다고 한다(조선의 일상, 법정에 서다).


영암군의 소장을 모아놓은 자료를 보면(영암군소지등본책-靈巖郡所志謄書冊), 1838년 7월 한달 간 영암군수에게 접수된 소장이 187건으로, 군수가 하루에 여섯 건 이상 소송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선 후기에 올수록 꺼림 없이 소송이 제기되었고, 쓸데없는 송사도 많아져 골머리를 앓았던 모양이다.

조선에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소송을 일삼는 행위, '비리호송(非理好訟)'을 천박한 행위로 보고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초기에는 전가족을 변방으로 이주시키거나(전가사변-全家徙邊), 이러한 잘못을 알고도 소송을 수리한 관원에게는 장 100대의 처벌을 가하는 엄중한 죄(지비오결죄-知非誤決罪)로 다스렸다. 후기에도 태형을 가하여 비리호송을 막고자 하였다.

근대사법에서 소송의 제기, 즉 재판청구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골간으로, 특히 우리나라는 헌법상 기본권으로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소송 제기 자체를 부당한 것이라고 막아버리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전자소송의 도입에 따라 소송제기가 간편해 지자, 상대방이나 판사 등에게 고통을 주려는 반복적·계속적 소송이 눈에 띄게 늘었고, 이에 대한 대처가 절실하게 되었다.

일례로, 정 아무개는 2020년 한해 무려 23,000여 건의 소송 및 상소를 제기하는 기록을 세웠다. 인지를 납부하지 않고 법원의 모든 명령을 무시한 채 꼬리에 꼬리는 무는 소송을 무차별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한해 수백 건의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이 각 법원마다 즐비하다. 전자소송을 이용하여 전국 각지 법원에 무더기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 욕설과 비속어를 섞어 도저히 소장이라고 볼 수 없는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다.

법원은 최소한의 절차를 거쳐 소각하 판결을 하고 있으나, 사법인력의 낭비는 정당한 국민의 재판청구권에 영향을 줄 지경이 되었다. 영미에서는 부당소송을 막는 법률을 만들어 부당소송인에 대한 소송금지명령과 같은 강력한 제도를 두고 있다. 법원모욕죄를 통한 형사처벌까지도 이루어진다.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부당소송을 막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유 없는 남소를 막는 최소한의 입법이 적극 고려되어야 한다. 이름만 소송일 뿐 실질은 소송이 아닌 사건에 허비되는 사법비용이 너무나 커졌기 때문이다. 현대판 '비리호송'을 걸러내지 않으면, 법원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소송을 제기하는 국민도 결국 힘들어지게 된다.


홍기태 원장 (사법정책연구원)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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