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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화양연화(花樣年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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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CC의 전심재판부는 지난 9월말 마지막 사건을 선고함으로써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개인적으로 부임한 지 6년여 만에 마침내 사건을 모두 처리하게 되어 감개무량한 측면도 있지만 캄보디아에서 보낸 짧지 않은 세월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스스로 되새겨 보지 않더라도 그간 세계 여러 곳에서 관심을 가지고 인턴으로 지원하여 같이 일했거나 인터뷰 등을 요청하는 젊은 법률가들에게 왜 이런 일을 해 오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여야 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가 합의한 ECCC의 설립 목표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 중 하나인 크메르 루즈의 범죄에 대하여 책임자를 밝혀내어 합당한 처벌을 하는 것이었다. 현재까지 처벌을 받았거나 재판 중인 사람들의 숫자가 극히 적다는 점에서 보면 위와 같은 목표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책임자 처벌의 범위에 대하여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 사이에 오랜 기간 공공연하게 이견이 노출되었고 최근까지도 재판소가 파국에 이르고 말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지만,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전심재판부가 모든 사건에 대해 최종판결을 내린 것은 최소한의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크메르 루즈 시대를 겪으면서 캄보디아에서는 법이나 재판에 대한 극도의 불신이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젊은 캄보디아 인턴들은 ECCC 지원 당시 부모의 강한 반대를 겪었다고 하였고, 어느 캄보디아계 호주 인턴 역시 처음에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6개월간 아들이 수행한 업무의 내용을 전해 들은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면서 이를 필자에게 보여 주었다. 아버지가 크메르 루즈를 간신히 피해서 난민으로 호주에 정착하게 된 스릴 넘치는 탈출기가 적혀 있었고, 이는 그간 가족에게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이야기라고 하였다.

ECCC는 재판을 통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주된 기능 외에, 후일 해당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에서의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도록 상세한 기록을 그대로 남겨 보존하고, 모범적인 수사와 재판 활동을 통하여 법의 지배가 실현되는 모습을 캄보디아를 포함한 세계에 널리 보이려는 목적 또한 가지고 있다. 국제재판관이 소수인 재판소 구조의 한계상 책임자 모두의 처벌에는 실패하였지만, 필자는 소수의견을 통해 캄보디아 정부의 집단학살죄 처벌에 관한 국제적 책임을 재차 강조하였다.

영화 '화양연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다른 사람에게 공개할 수는 없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앙코르와트 사원 기둥의 구멍에 묻어 버리기로 한다. 앙코르와트는 실제로 거대한 무덤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앙코르와트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 중의 하나는 측면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부조들, 그 중에서도 힌두교 대서사시 바가바드기타 중 쿠루크셰트라 전쟁을 묘사한 부분이다. 주인공은 가까운 친척들을 죽여야 하는 전투의 의미에 대해 끊임 없이 번뇌하지만 신의 대리인인 크리슈나는 일의 결과나 성패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정의'를 위한 싸움을 해야 하는 크샤트리아의 본래 의무(다르마, 法)를 계속 상기시킨다.

ECCC가 캄보디아에서 이루어 낸 일은 비록 최선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쉽게 잊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유엔이 주도하는 잔여업무처리기구(Residual Mechanism)도 이미 활동을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여러 정치적 압력 아래에서도 법의 원칙에 따라 공정한 방식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EC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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