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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형사재판 기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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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서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꺼려지는 일이다. 생사여탈이 달린 형사재판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요즘엔 재판을 주재하는 판사에게도 형사는 절대 피하고 싶은 재판이 되었다. 법관인사와 사무분담에서 형사재판을 피하기 위한 치열한 두뇌싸움과 아슬아슬한 긴장관계가 생겨날 지경이다.


법치국가에서 사적 복수는 금지되고 국가가 독점적인 형벌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형사재판은 사법의 핵심 징표이고, 형사재판이 바로 서지 않는 한 사법에 대한 신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출발점에는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판사가 있다. 주어진 일에 대한 법관의 성실함을 믿는다 할지라도, 마지못해 떠맡은 일과 흔쾌히 떠안은 일이 같을 수 있을까.

사법정책연구원에서 법관 업무부담과 관련하여 민·형사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응답 판사 중 75%가 민사를 선호한 반면 형사를 선호한다는 판사는 4%에 불과하였다. 형사가 재판절차상 검토할 내용이 많고, 양형 부담이 크며, 민사에 비하여 결론이 불명확한 경우가 많고, 언론노출의 부담이 있다는 등 형사사건이 민사사건에 비하여 지적, 체력적 소모가 크다고 응답하였다.

이유야 어떻든 판사들이 형사재판을 기피하는 현상은 재판신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사회안전이나 정의실현에 밀접히 연관되는 형사재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법관의 존재 기반이 되는 사법신뢰의 확보를 간절히 소망하는 판사라면, 재판의 부담에 앞서 형사재판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우선순위에 두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차피 법관 임기 동안 어려운 사건이나 형사재판을 맡게 될 운명이라면,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이 재판을 위임한 국민에 대한 도리이다.

그렇다고 이 모든 해결책을 법관의 사명감에만 기댈 수는 없다. 판사들이 형사재판을 기피하는 이유의 근저에는 한계에 이른 업무량이 존재한다. 어쩌면 형사재판의 기피는 업무여력이 있는 재판을 맡아 조금이라도 충실한 재판을 함으로써, 자신의 일에 대한 긍지와 보람을 찾아보려는 판사들의 자구책일 수도 있다. 미국 판사들과의 다양한 인터뷰를 보면, 형사가 민사보다 업무시간이 적고 업무상 부담도 적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상당수의 사건이 협상이나 간이재판을 통하여 처리되고 배심제가 도입되어 있기에, 미국 형사재판에서의 법관의 업무부담은 우리와 비교불가할 정도이다.

그동안 어느 사건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논리로, 많은 형사사건을 공판에 넣어 시간에 쫓기는 숨찬 재판을 해왔다. 그 와중에 공판중심주의의 강화로 형사재판의 부담은 한 없이 늘어났다. 그 결과 어느 사건 하나 온전한 재판에 이르지 못하고, 판사들은 감당할 수 없는 형사재판을 극도로 회피하게 되었다. 이제 판사의 대폭 증원과 함께, 약식명령과 공판의 중간 단계에 있는 별도의 형사절차를 모색해 볼 때이다.


홍기태 원장 (사법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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