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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Sense and Sensi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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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두 개의 대법원 판결(2017두74702, 2018도7709 판결)에서 등장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논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 하다. 대법원이 이 개념을 이용하여 하급심의 사실 인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그 의미가 모호하고, 번역에도 문제가 있으므로 다른 용어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용어의 유래에 대해서는 대체로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 여성대회를 시초로 보는 입장이 다수이고, 영어 원문에 대해서는 'gender sensitivity'로 보되, '성인지적 관점'으로 통상 번역되는 'gender perspective'와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 논의들은 국제적으로 오래 전부터 확립된 젠더 평등을 위한 핵심 전략으로서 'gender sensitivity'나 'gender perspective'를 모두 포괄하는 상위 개념인 '젠더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젠더 주류화는 젠더 관점(gender perspective)을 국가의 모든 정책에 반영, 통합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위 정책 실행에 따라 만들어지는 각종 조치나 프로그램은 기존의 젠더 규범이 끼치는 영향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gender sensitive) 젠더 불평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필자가 근무하는 재판소의 경우에도 gender focal point로 지정된 직원이 재판을 포함한 모든 활동을 젠더 관점에서 상시 검토하고 있다.

국제 사회는 사회·문화적으로 이미 형성된 성별 역할과 고정관념, 즉 젠더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여성의 권리신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제반 사회 활동의 설계 단계에서부터 젠더 평등에 대한 고려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합의를 이루었다. 이를 '젠더 주류화'라 칭하였으며, 위 베이징 회의를 거쳐 1997년 유엔 경제사회위원회에서 정의 규정을 마련한 이래, 현재까지 일관되게 그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젠더' 개념에 대한 공감대조차 최근까지 쉽게 형성되지 않았던 듯하다. 위 국제사회의 논의를 뒤늦게나마 수용하기 위해 2014년 제정된 '양성평등기본법'은 그 제정 이유로 "세계적으로 바뀐 여성정책의 패러다임인 '성 주류화' 조치를 체계화하는 것"을 들고 있는바, '젠더' 개념을 상정하지 않는 '성(sex)'의 주류화라는 것은 '성인지 감수성' 못지 않게 직관적 이해가 쉽지 않은 용어이다.

대법원 판결 역시 양성평등기본법을 명시적으로 인용하고 있으므로, 궁극적으로는 젠더가 가지고 있는 권력관계 구조에 주목하는 '젠더 주류화'의 접근 방법을 증거판단에 도입하는 취지로 이해할 수 있으며, 기본 인권의 하나인 '젠더 평등'을 보장하여야 할 사법부로서 마땅히 취하여야 할 태도로 볼 수 있다. 이미 국제 사회는 불평등 구조를 놓치지 않는 'gender sensitive' 를 넘어서 'gender transformative', 즉 젠더 구조 자체를 더 평등하게 재구성하는 단계를 지향하고 있다.

젠더 구조에 무관심한 상태에서 종래의 판단 논리를 고수하는 것은 외견상으로는 'gender neutral'이지만 불평등 구조를 영속화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불완전한 일부 번역투 용어를 주된 논제로 삼는 것은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이른바 '훈제청어(red herring)' 논변에 가깝다. 젠더에 관한 국제 논의는 이미 '감수성(sensibility)'의 대상을 넘어 '상식(common sense)'의 영역이 되었다.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EC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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