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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법학위기론에 관한 한 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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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 막 진학한 90년대 중반, 더듬더듬 배운 일본어로 일본 법률문헌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한글로 된 법률문헌은 지금보다 훨씬 빈약했기 때문에, 다양하고 풍성한 논의를 담고 있는 일본의 주석서와 단행본을 보면 부러운 마음과 약간의 열등감마저 들었다. 나와 나의 동료들도 실력을 갈고닦아 언젠가는 한글로도 저렇게 풍성한 문헌들을 가져보리라는 각오랄까 객기를 품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우리가 금과옥조처럼 읽던 교과서와 논문들이 일본문헌을 그대로 참고한 경우가 많음을 알게 된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구성과 흐름이 비슷해서 일종의 번안물 같은 경우도 있었다. 한국문헌과 일본문헌을 좌우로 펴놓고 대조해가며 읽다 보면 편하면서도 자괴감이 들었다. 양상에는 차이가 있지만 다른 외국문헌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수입법학의 극복을 주장하며 독자적인 문체로 논문을 쓰시던 몇몇 젊은 교수님들께 크게 끌렸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 불과 20여년 만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의 전공분야를 보면 우리 판례도 많이 축적되었고 주석서, 논문, 단행본, 연구보고서 등 풍부한 한국문헌이 쏟아지고 있다. 외국법에 관한 글도 국적 불명의 번안물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 해결이라는 맥락에서 하나의 참고대상으로 외국법을 분석한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문헌 하나하나의 질과 수준에는 문제도 많을 테지만, 적어도 맥락 없이 외국문헌을 베끼거나 번안하는 식의 작업은 드물어졌다.

일본문헌 리서치를 강조하여 "일어를 모르면 판사(判事)가 아니라 반사(半事)"라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실무에서도 한국문헌들을 통해 법리의 갈피를 잡고 고민한다. 실무와 학계의 공동작업이나 교류도 활발하다. 그 때문인지 요새는 일본 주석서를 살펴봐도 예전 같은 위압감을 받지는 않고, 오히려 한국 주석서나 논문이 더 밀도 있는 고민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국제적인 평가도 좋아지고 있다. 학자들의 동료평가를 중시하는 2021년 QS 세계대학 랭킹 '법학' 분야에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는 각각 33위, 58위, 84위이다. 비영어권에서는 각각 6위, 22위, 39위에 해당한다.

최근 법학의 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우수한 전업연구자가 급감하면서 기초법학 등 몇몇 영역의 고사마저 우려된다. 실무와 건강한 거리를 둔 이론적 연구의 독자성 확보도 절실하다. 그러나 연구성과의 양과 다양성에 있어서나, 현실 적합성에 있어서나, 국제적인 평가에 있어서나, 그동안 분명한 발전이 있었음도 일부러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열풍 속에서 국제적으로 잘 나가는 대중예술과 달리 위기에 처한 법학을 곰곰이 반성하다 보니, 우리도 지난 수십 년간 이룬 것이 적지 않음을 깨닫게 됐다. 법학의 위기에 대한 반성이 자학적인 개탄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건설적인 대안으로 이어지려면 우리가 이룬 것을 정당히 인식하면서 우리가 놓친 것들을 힘써 보완해 나가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천경훈 교수 (서울대 로스쿨)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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