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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법조의 직업적 소명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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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召命)은 종교적으로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부르심을 뜻한다. '부르다'는 뜻의 라틴어는 vocare인데 여기에서 영어 vocation이 나왔다. 독일어로 직업 또는 소명을 의미하는 Beruf는 종교개혁 시대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처음 등장한 것인데, 하나님이 수여한 과업이라는 의미로 오직 믿음으로 세속적 의무를 다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서구에 있어 직업은 하나님이 부르신 천직(天職)으로서의 소명이라는 의미가 그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의미와 굳이 연결하지 않더라도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 역시 소명 의식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소명과 무관한 것이라면 직업에는 귀천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직업은 기본적으로 생계 유지를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일정한 소명이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법조 직역의 직업에 있어 소명은 무엇일까? 법관은 공정하게 재판을 하여야 하고, 검사는 공정한 절차에 따라 수사하고 기소하여야 하며, 변호사는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의뢰인을 위하여 변론을 하여야 한다면, 공정한 절차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 하는 것이 소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정이란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곧 법률가라는 직업에 있어 요구되는 법과 원칙, 직업적 양심에 따라 각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조 직역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법조 직역에 대한 국민신뢰는 점점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다.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법관은 재판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을 표출한다. 법관이 법관의 재판을 믿지 못한다. 검사가 검사를 고발하고, 검사가 검사를 수사한다. 기소가 된 검사는 기소의 불공정성을 주장한다. 변호사들은 의뢰인의 이익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공정을 생각하기 어렵다. 법관도, 검사도, 변호사도 모두 자기부정을 하고 있다. 직업에 있어서의 소명의식은 희미하고, 소명에 대한 인식 자체도 흐릿하다. 비록 일부일지라도 그 일부의 모습이 전체를 덮고 있는 상황에서 소명의식 없는 자기부정 직업군에 대해 누구도 신뢰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법조 직역의 소명의식 부족은 법조에 대한 신뢰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나아가 이 땅의 법치주의를 무너뜨리게 된다. 소명의식이 없다면 소명의식을 대체할 무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수사와 기소의 공정성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지, 재판의 공정성을 무엇으로 담보할 것인지, 사법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어떠한 시스템도 시스템 내의 직업수행자들의 소명의식을 대체해 주지는 못한다는 데에 근본적인 고민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의료인의 소명의식이 빛을 발하듯이, 법치주의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법조인의 소명의식이 절실하다. 법조 직역의 소명의식 회복이 없다면 현재의 위기가 고사(枯死)의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 법조 직역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Bullshit job이 될지도 모른다. 법조의 직업적 소명의식에 대한 고민이 많이 필요한 시대인 듯 하다.


이상철 변호사 (법무법인 태평양)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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