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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세월 저어가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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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사진은 중년 남자들이 우정을 확인하는 은밀한 방법이다. 친구들끼리 밥을 먹다보면 누군가 수줍게 핸드폰을 꺼낸다. "내가 말이야, 요즘 등산 가서 사실 이런 사진 찍어." 친구가 건네준 핸드폰 속에는 이름 모를 꽃이 순도 100%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내 소중한 친구가 같은 꽃을 가까이에서도 찍어보고 멀리서도 찍어본 그 사진들은, '그 날 그 산속에서 인간의 정신이 한껏 고양되어 100%의 미(美)와 하나 된 순간이 있었다'는 기초사실을 증명력 넘치게 입증한다(갑 제1호증).


20대 때였다면,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둥 엄청 놀려댔겠지만, 중년이 된 우리들은 갑 제1호증을 소중하게 돌려보며 각자 깊은 감동의 시간을 가진다. 어디 꽃 사진뿐이랴. 언젠가 친구들과 간 식당에 고흐의 1890년 작품 '꽃 피는 아몬드 나무'가 걸려 있었다. 이 그림의 아름다움을 중년 남성이 그냥 지나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런 고백이 쏟아진다. "야, 내가 말이지, 이 그림 너무 좋아서 방에 걸어놨어. 볼 때마다 진짜 좋아. 옛날엔 이런 거 몰랐는데….” 로스팅 정도에 따른 미묘한 커피 맛 차이에 반응하고, 음표와 음표 사이의 짧은 침묵의 미에 젖어든다. 기와집이나 소나무, 골동품과 사랑에 빠지고, 헌법재판소 뜰에 핀 꽃 이름을 검색하거나, 걸음을 멈춰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핸드폰에 담아두게 된다. 모두 같은 맥락이다. 흙탕물 가라앉듯 마음 가라앉으면, 그동안 놓쳤던 작은 아름다움들이 그 빈자리로 깊숙이 들어온다(다툼 없는 사실).

냉철한 중년의 법률가도 다툼 없는 사실 얘기를 시작하면 처음 연애하던 때의 열정이 돌아오게 마련이다(※주의: 옆에서 듣다 적당한 때에 끊지 않으면 시간이 너무 가버린다). 다툼 없는 사실 얘기는 대개 훈훈하게 끝나지만, 뜻밖의 양심선언으로 숙연해지기도 한다. "이런 거 하나도 몰랐어도 20대 때가 더 좋았어." 용기 있는 양심선언은 언제나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양심선언 속 진실은 외면해도 사라지지 않고, 코로나 덮친 올 여름은 마음마저 덥다. 어느새 중년이 된 레이지본의 노래 '어기여차'(2019)를 부르며 함께 세월을 노 젓는 수밖에. "삶이란 말에 끝이란 뜻 없더라."


이재홍 선임헌법연구관(헌법재판소)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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