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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취재수첩] '학습된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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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 때나 통용되던 관행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객관적 증거가 아니라 학습된 진술에 의존하는 잘못된 수사관행이 일으킨 참사라고 생각합니다."


성폭력 사건을 조사한 검사가 피해자에게 경찰 진술조서를 보여주는 등 유도신문을 통해 피고인의 혐의를 입증하려다 법원에서 제동이 걸렸다는 기사<본보 2021년 7월 8일자 1면 참고>를 본 한 변호사의 말이다.

최근 광주지법 순천지원과 광주고법은 전 여자친구를 강간한 혐의(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로 기소된 A씨에게 잇따라 무죄를 선고하면서 검찰의 이 같은 잘못된 수사방식을 지적했다.

법원은 "피해자는 경찰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피고인이 피해자의 반항을 제압하고 간음하게 된 경위에 관해 구체적으로 진술했는데, 검찰 조사 과정에서는 DVD방에서 자신의 양 팔목을 잡은 상황까지는 기억에 의존해 진술하다가 그 이후 상황을 묻는 검사의 질문에는 검사로부터 (성폭행 피해상황이 적힌) 기록을 받아 46초가량 읽은 후 비로소 진술하는 모습을 보였다"며 "기억 환기를 위해 종전 진술내용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하더라도, 범행 주요부분에 대해서조차 자신의 기억대로가 아닌 경찰 진술을 참고한 뒤에야 비로소 대답했다. 이러한 조사방식을 통해 얻어진 피해자 검찰 진술을 기억대로 진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꼬집었다. 또 "검찰 조사에서 경찰에서 진술하지 않았던 부분을 새롭게 추가하거나 범행의 주요 부분 진술을 변경하기도 하고, 이마저도 대부분 검사의 유도신문에 의해 진술해 피해자의 검찰 진술이 경찰 진술과 일관된다고 평가하기 어렵다"고 했다.

자칫 묻힐 뻔했던 이 같은 사실은 검찰 조사를 미심쩍게 생각한 변호인이 피해자 조사 장면이 담긴 영상녹화물을 열람해, 조서와 실제 조사내용이 다른 사실을 발견하고 재판에서 문제를 제기해 드러나게 됐다.

수사실무상 피해자의 진술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사기관의 항변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 발견을 통한 유죄자 필벌도 기본권 보장과 적법절차의 원칙 속에 이뤄져야 한다. 특히 피고인의 방어권과 무죄추정의 원칙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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