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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여론의 덫, 여론조사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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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형법의 '친족상도례' 폐지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발행한 최근 보고서도 폐지 여부를 논해야 할 때라는 주장을 펴면서, 한 언론사 설문조사의 결과를 인용했다. 이에 따르면 친족상도례 조항을 폐지하여야 한다는 응답이 전체 응답자 3만2458명 중 85%(2만7702명)다. 압도적 폐지 찬성 여론이다. 국회에 폐지법안이 발의되어 공론화될 것이라고 한다. 무슨 연유인가 봤더니, 유명 연예인이 소속사 대표인 형으로부터 출연료 등 100억 원 상당의 피해를 봤지만, 형이 동거 친족이나 가족이라면 친족상도례 규정 때문에 형이 면제되거나 고소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다는 보도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수억대의 사기나 횡령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다면 누구나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친족상도례의 폐지에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정반대의 사례가 보도된 후 여론조사라면 어떠했을까. 생활비도 주지 않는 남편의 지갑에서 부인이 몰래 돈을 꺼내 생활비로 사용했는데, 이를 안 남편이 고소했다면, 그리고 친족상도례가 폐지되어 부인이 처벌받았다는 보도가 나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보나 마나 친족상도례가 부활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을 것이다.


여론조사의 함정이자 여론의 덫이다. 언제 여론을 조사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어떤 내용의 설문으로 하는지 등등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이처럼 여론조사 기법은 과학성으로 포장한 비과학성이다. 여권 인사의 성추행 사건 이후에 여성가족부 폐지를 물었다면, 지금처럼 북한과의 아무런 교류도 접촉도 없는 상황에서 통일부 폐지 여부를 조사했다면 폐지 여론이 우세했을 것이다. 여야의 대선 잠룡들에 대한 선호도 조사도 때와 방식에 따라 출렁인다. 언론에 노출이 많이 된 직후이면 지지도는 금세 올라간다. 그래서 여론을 얻으려 거칠고 자극적인 언사를 내뱉는다. 유력 주자와 각을 세워야 인기가 올라간다. 그래야 한 번이라도 더 언론의 주목을 받고 여론조사의 결과로 이어진다. 여론조사의 결과에 취해 막 나가는 정치인도 많다. 전체 유권자를 대표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신뢰성도 떨어지지만, 그 결과가 언론에 공표되면 지지율이 되고 선호도로 굳어진다. 여론조사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여론조사를 믿을 수 없다면서도 여론조사에 따라 춤을 추게 마련이다. 표본오차를 무시하고 1%라도 앞섰다고 하면, 마치 당장이라도 대통령에 당선될 것 같다. 어느 정도 지지율이 나오면 너도나도 대망을 품는다.

그러면서 정치는 망가지고 있다. 원칙을 지키는 정치보다는 여론의 눈치를 보는 정치가 횡행한다.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여론조사가 등장한다.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한다. 당의 대표를 선출하는데도 당원의 의사가 아니라 그 당과 무관한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한다. 그 당에 찬동하지 않는 자의 역선택의 부작용도 있지만, 국민을 앞세우며 여론조사가 필수요소다. 민심을 알아보기 위한 참고 자료에 불과한 여론조사가 당 대표, 지자체장 후보, 대선후보를 좌지우지한다. 그래서 공약이나 정책보다는 인지도에 영향을 미치는 인상이나 이미지에 신경을 쓰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상대방을 공격하고 정권을 비난하는데 열을 올린다. 국민을 앞세워 민심을 떠보고 여론의 눈치를 살펴서 국가정책, 정당 정책, 후보의 소신과 이념을 쉽게 바꾸는 것은 민주주의의 허울일 뿐이다. 여론을 살피는 것은 중요하지만, 여론은 여론일 뿐, 여론조사는 조사일뿐 진정한 국민의 뜻과 다를 수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하태훈 교수 (고려대 로스쿨)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