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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기

[나의 여행기] 런던에 다녀온 박진석 변호사

관광객 붐비던 트라팔가 광장은 팬데믹으로 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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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enough College : 필자가 살고 있는 굿이너프 칼리지

 

 “런던에 지겨워진 사람은 인생에 지겨워진 사람이다.” 새뮤얼 존슨이 지겨울 겨를이 없다고 했던 바로 그 런던의 화려한 여행기를 기대하신 분들에게 정중한 사과부터 드린다. 이 글은 관광객이 사라진, 고즈넉하고 소소한 런던의 일상 이야기다.


대영박물관, 런던대학, 런던 법조타운 등 

지근거리에


런던에서 유학하게 된 아내를 따라 나도 런던정경대(LSE) LLM에서 공부하기로 하고, 작년 8월 유학길에 올랐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확진자가 많았던 영국으로의 출국이 걱정되었지만, 해외 생활의 설렘과, 법조인생 10년의 내 자신을 돌아볼 때가 되었다는 자기 위안과, 새로운 기회를 발견해서 화려하게 돌아가리라는 망상에 힘입어 호기롭게 출국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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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mb : 1720년부터 램즈콘듀잇 스트리트의 터줏대감 역할을 하고 있는 펍 The Lamb

 

우리 동네 이름은 블룸즈버리(Bloomsbury). 대영박물관과 런던대학교가 있고, 런던의 법조타운 홀본(Holborn)과 붙어 있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오랫동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지역이다. 내가 살고 있는 다국적 대학원생들을 위한 가족생활시설 굿이너프 칼리지(Goodenough College) 역시 여왕이 후견인(Patron)으로서 몇 년에 한 번씩 방문하는 유서 깊은 기관이다. 세인트폴 대성당과 트라팔가 광장을 걸어서 갈 수 있는 이 곳은, 팬데믹 이전에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지만 지금은 주민들만 드문드문 보이는 아주 조용한 동네가 되었다. 


건물 대부분이 옛 모습 간직

‘런던의 깊은 맛’으로

 

덕분에 우리 부부는 ‘현지인처럼 살아보고 싶다’던 꿈을 의도치 않게 훨씬 일찍 달성했고, 우리 동네의 숨은 보석, 램즈콘듀잇 스트리트(Lamb’s Conduit Street)를 알게 되었다. 코람즈필즈와 홀본경찰서를 잇는 500 미터 남짓의 이 거리는 16세기 자선사업가 William Lamb의 이름을 딴 아담한 골목길인데, 나의 등하굣길이기도 했다. 이 거리의 터줏대감은 ‘더 램’(The Lamb)이라는 펍이다. 1720년부터 이어져 온 역사가 무색할 만큼 소탈하고 시끌벅적한 이 동네 사랑방에서 나는 처음 캐스크 에일 맥주를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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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o Bella : 우리 동네 인기 맛집 이탈리아 레스토랑 Ciao bella
 

바로 그 옆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치아오벨라’(Ciao Bella)는 인근 대학 교수님들에게도 인기있는 식당. 손님들과 푸근한 농담을 주고받는 주인아저씨는 아내와 내가 LSE 학생이라는 걸 아시고는 “얼마전 식사값을 나누는 쉬운 계산조차 어려워하는 손님들이 있었는데, 너희 학교 경제학과 교수들이었단다.” 라고 익살스럽게 말씀하셨다(참고로, LSE 경제학과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13명이나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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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Fromagerie : 치즈와 와인을 파는 식료품점이자 브런치 카페인 라 프로마제리아
 

 이 거리를 설명할 때 ‘페르세포네’(Persephone books)를 빼놓을 수 없다. 다섯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찰 것 같은 작은 공간에서 여성작가들의 문학작품들을 주로 다루는 작은 출판사 겸 서점이다. 버지니아 울프와 제인 오스틴의 소설책은 이 서점만의 아기자기한 꽃무늬 표지로 예쁘게 진열되어 있다. 이제 그 맞은편으로 가보자. ‘라 프로마제리아’(La Fromagerie)는 치즈와 소시지, 와인 등을 파는 식료품 매장이면서 브런치도 먹을 수 있는 멋진 식당인데, 이곳 야외테이블에 앉아 거리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소소한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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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rance and Son : 고풍스런 모형 범선이 진열된 우리 동네 장의사 A. France & Son

 

‘도슨 꽃집’(Dawson Flowers)은 이 거리 한 가운데에 있는데, 영국인들의 가든 사랑을 고려하면 가장 좋은 자리를 꽃집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옆에 붙어 있는 ‘A. France & Son’이라는 가게는 근사한 모형 범선이 놓여 있어 뭐하는 곳인지 짐작할 수 없었는데, Cremation and Embalming을 영어사전으로 검색해 보고 나서야 대대로 이어져 온 장의사라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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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Plaques : 역사적인 인물이 살았던 건물에 붙어 있는 블루 플라크

 

락다운 중에도 그리 힘들지 않았던 것은 블룸즈버리에 녹아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덕분이었다. 역사적인 인물과 관련된 건물에 붙인 파란 동판을 ‘블루플라크’(Blue Plaque)라고 하는데, 블루플라크를 찾아 떠나는 장바구니 투어의 재미가 쏠쏠했다. 찰스 디킨즈는 바로 앞 건물에 살았고, 버지니아 울프와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그 유명한 ‘블룸즈버리 그룹’으로 활동하며 이웃으로 지냈다. 칼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 도서실에서 말년을 보냈고, 레닌이 망명 생활 중 머물렀던 곳도 바로 블룸즈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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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상징 빨간 2층 버스가 지나가는 옥스포드 스트릿
 

런던에 와서 생활하면서 ‘전통’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UK Corporate Law’ 수업 첫 시간에 다룬 판례는 회사의 법인격을 처음 인정한 1897년 Salomon v Salomon 사건이었는데, 120년 전의 이 판결문이 지금 학생들도 큰 어려움 없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여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같은 해에 작성된 한성재판소의 판결문을 찾아보고 나서 해석조차 할 수 없는 나로서는, 아픈 역사로 인해 단절된 우리의 전통과는 달리, 차곡차곡 쌓여서 지금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이 곳의 전통이라는 것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사적 인물 관련된 

건물 찾아 떠나는 투어도 ‘재미’

 

지난 주 마지막 시험을 끝으로 나의 LLM 과정은 모두 끝이 났지만, 2년 과정에 있는 아내 덕분에 앞으로 1년 더 런던에 머물게 되었다. 더 넓은 런던보다 더 깊은 런던을 경험하고 싶다. 특별할 것 없는 나의 일상이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잠시나마 기분 전환을 해드렸다면 바랄 게 없겠다. 욕심이 있다면, 제대로 인사 못 드리고 오는 바람에,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실 법조 선배님, 동기,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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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명물인 스카이가든에 가면 런던의 랜드마크인 '더 샤드'를 비롯한 현대의 모습과 과거의 모습이 공존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박진석 변호사 (서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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