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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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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따뜻한 격려와 진심은 세월이 흘러도 잊기 어렵다. 감동과 깨우침을 준 고마움도 평생에 남는다. 늘 기억하고 사람으로서 도리, 의리(義理)를 지켜야 하는데, 하루하루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어느새 시간만 훌쩍 지나갔다.

 

10년 전 영국 유학 시절, 서울로부터 갑자기 부여된 과제 해결을 위해 인터넷 검색 끝에 런던 스네어스브룩 형사법원(Snaresbrook Crown Court)에 연락하여 존 래퍼티 판사(Judge John Lafferty)를 만났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시각장애 법관으로 중요 형사사건의 1심 재판을 전담하고 있었다. 영국의 시각장애법관 현황 등을 보고하라는 과제였는데, 이왕이면 직접 찾아뵙고 싶었다. 가족들이 청사 구경을 하는 사이, 나는 그곳 직원들 안내로 오후 재판을 방청하고 이후 집무실에서 1시간 동안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영국의 중죄 형사재판 자체를 처음으로 방청한 데다가 영어도 서툰 나였지만, 그의 재판진행은 그런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 완벽하였다. 피고인, 변호인, 검찰 측 변호사, 배심원들에 대한 소송지휘와 석명이 매끄러웠을 뿐만 아니라 위엄 있었다. 준비해간 질문지가 부끄러울 지경이었으나, 그는 모든 질문에 차근차근 답변해주었다. 법관용 전산시스템에 음성지원 기능이 갖추어져 있고 문헌 자료도 음성 또는 점자 지원이 되며, 법정 메모도 점자키보드로 하여 불편함이 없다면서 몇 가지 시연해보기도 하였다. 그림은 소송관계인의 묘사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떠올린다고 하였다. 개발도상국의 시각장애인들을 돕는 일도 후원하고 있다고 하였다. 자신감과 유머가 넘쳤고, 아무런 인연 없이 홀로 찾아온 외국의 젊은 법관에게 그토록 친절하게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허여하는 넉넉함이 있었다.

 

그날 밤 감동과 흥분 속에 귀가하여 자정 무렵 과제보고서를 완성하여 인사실에 송부하였다. 스스로 편견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부끄러운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감사의 메일을 드렸고, 귀국 후에도 인연이 닿아 몇 년 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의 전통무늬 연하장을 보내드리면 아름답다는 답장을 주는 그였는데(묘사를 들었을까?), 얼마 전 정년퇴직 하였다고 한다.

 

그의 선한 영향력과 친절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오랜만에 안부편지를 드려야겠다.

 

 

이의영 고법판사 (서울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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