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월요법창

폭풍의 언덕

168888.jpg

어린 시절 읽은 책은 30년이 넘게 지났지만 제목만 들어도 떨리는 마음이 여전하다. 그 시절의 감동이 지금과 같을 수 없음은 물론이나, 그토록 새파랗게 예민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사춘기를 추억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일까.

 

하루에도 몇 권씩, 온갖 책들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읽던 시절이다. 세상의 책들은 모조리 읽겠다는 얼토당토 않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생물학적으로 여자로 태어났기에 자연스럽게 근대 여성 작가에 관심이 갔다. 19세기 보수적 영국 사회에서 작가로 활동하기 위해 남성 필명을 사용한 조지 엘리엇, 20세기 잉글랜드 모더니즘을 이끈 버지니아 울프 등을 차례로 알게 되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막 사춘기가 시작된 소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든 책이었다. 평생을 작은 마을의 목사관에서 살았다는 브론테 자매. 창의력과 상상력이 얼마나 뛰어났으면 이런 불꽃같은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

 

재작년 가을 드디어 영국 요크셔의 하워스(Haworth), 브론테 자매들이 살았던 마을에 가볼 수 있었다. 풋패스를 따라 아름답고 드넓은 황야를 걷고 또 걸었다. 어느 순간 저 멀리, 언덕 위의 나무와 히스클리프의 집(Top Withens)이 보였다. 손가락 마디만큼 보일 때부터 나는 '저 나무가 그 나무'라고 확신했다. 손에 잡힐 듯, 곧 도착할 듯, 그러나 한참을 걸어야 했다. 포기하지 않고 바람을 헤치며 걸어간 끝에 언덕에 도착했다. 햇볕과 바람, 황야와 야생풀, 홀로 뻗은 나무와 돌벽. 30년 전 상상했던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나타나서, 꿈일까, 현실일까 팔을 꼬집었다. 

 

누가 읽어줄지, 출판이 가능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150년 뒤 지구 반대편에서도 열독하는 책을 쓴 브론테 자매의 창의력과 의지의 원천은, 그 언덕과 나무였던 것 같다. 엄청난 독서광이었던 그들은 탁 트인 황야에서 바람을 가르며 걷고 또 걸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여행이 어려운 지금, '폭풍의 언덕'은 정말 꿈만 같다. 독서와 사색의 시간 없이 숙제와 바쁜 일정에 매몰된 아이들도 안쓰럽다. 나도 기록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오늘도 최선을 다해 차분히 해답을 찾아가야 하는데, 늘 그렇듯 참 어렵다. 황야를 걸었던 그날을 떠올리며 힘을 내본다.

 

 

이의영 고법판사 (서울고법)

리걸에듀

관련 법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