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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계약서의 세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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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로 근무할 때 이따금씩 동일한 주제의 계약서라도 우리나라 계약서는 동양화와 비슷하고 영미의 계약서는 세밀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표준화된 아파트임대차계약서는 9개의 조항 정도를 담고 있고, 약간의 특약사항을 더하더라도 대부분 1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공인중개사나 임대인, 임차인 모두 "기타 명기하지 않은 사항은 주택임대차보호법 및 일반부동산 거래관례에 따르기로 한다"라는 문구를 특약에 넣고 나면 더 이상 협상하려고 하지 않는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말하기 껄끄러운 다양한 경우의 수를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데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변수들을 얘기하는 것에 대해 상대방이 "나를 못 믿는 것이냐"라는 반응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상세한 계약서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것도 이렇게 단촐한 계약서가 통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반하여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몇몇 임대차계약서를 보면 계약 내용이 매우 자세하다. 예컨대, 임차인의 가족이 몇 명인지 명기하고 각자의 이름, 나이 등을 기재한다. 그리고 명기된 가족 이외의 자가 방문하여 15일 이상을 머무를 때에는 임대인에게 통지하도록 하는 등 매우 시시콜콜한 사항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규정하곤 한다. 

 

그런데 계약이 순조롭게 이행되는 상황에서는 사실 이미 사인한 계약서를 꼼꼼히 정독하지도 않는다. 계약서의 규정은 그야말로 분쟁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가상의 분쟁 상황에서 당사자의 권리 의무를 상세하게 규율하고 있는 계약서는 치밀한 협상과 다양한 분쟁 상황에 대한 데이터의 축적물이다. 그에 걸맞는 협상과 과거 분쟁의 데이터들이 없다면 정교하고 치밀한 계약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번 학기부터 학교에서 맡은 업무로 인하여 강의 시간 외에도 학교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관하여 학생들과 의견을 나눌 기회가 많아졌다. 그런데 새로운 교내 모의시험의 실시와 관련하여 시험 과목과 출제 형식 등만을 확정하고 '관례(?)'에 따라 실시하고자 했는데 학생들로부터 많은 질의가 이어졌다. 시험 시작 이후 퇴실 가능 시점은 언제부터인지, 새로 시행되는 모의시험에 결시한 경우 불이익은 무엇인지 등등 아주 구체적이고도 세부적인 질문과 함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건설적인 의견 개진도 많이 하였다. 새삼 내가 다녔던 시절 대학교의 모습이 여백의 미를 강조한 동양화라면 현재의 대학교는 작은 부분까지 자세하고 꼼꼼하게 그리는 세밀화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학내 구성원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야 하고 다양한 가상 상황에 대한 처리 방안을 미리미리 공지하여야 한다. 학교생활에서 여백의 미는 많이 사라졌지만 그 여백을 구성원 상호 간의 의견 교환과 사전 협의를 통해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세밀하게 채워 나간다면 보다 나은 배움의 장이 될 것으로 믿는다.

 

 

정소민 교수 (한양대 로스쿨)

리걸에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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