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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臺에서

녹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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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연휴에 집어 든 책은 '전봉준 재판정 참관기'(서해문집, 2017)입니다. 여러 해 책장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게 안타까워 이번에야말로 읽어주겠다는 자비심의 발로였습니다. 150여 쪽에 불과해서 넉넉잡아 반나절이면 볼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도 깔려 있었지요. 그러나 연휴 내내 책을 끼고 있으면서도 다 보지 못했고, 책은 150쪽이 아니라 15,000쪽 이상의 무게로 나를 번민(煩悶)하게 했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한 6번의 공초(供招, 신문기록)와 판결문이 번역되어 있는 이 책은 내게 묻습니다. 역사적 전환기에 재판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가.

 

녹두장군의 실패와 죽음은 그 자체로 비장한 서사시입니다. 불의에 항거했던 장군이 만민이 고르고 편하게 사는 세상을 열어주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몇 줄의 감상을 넘어 역사적 의미를 찾는 것은 내 능력 밖입니다. 대신 내가 고민한 것은 신문과 판결문의 내용입니다. 상황과 제도가 너무 달라 그 절차를 지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비교해볼 수 있는데, 장군을 사형에 처한 신문과 판결문의 내용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죄를 추궁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따지는 글의 내용은 100여 년 사이에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판결문은 역사적 맥락을 떼고 나면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추었고, 별다른 하자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내가 지금 완벽하다고 쓴 판결도 얼만 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환기에 역사적 흐름을 반영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해서 100년 뒤에도 살아남을 그런 판결을 써야 하는가. 판결에 시대정신(Zeitgeist)을 담아야 하는가.

 

얼마간 고민하다가 관두었습니다. 사태에 대한 전체적 조망은 사태를 벗어난 곳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시대정신이라는 애매하고 보이지도 않는 말에 매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밝혀야 할 시대정신은 이미 법률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억울한 당사자와 안타까운 사연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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