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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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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말, 영국 맨체스터의 판사로부터 "작은 소포를 보내려고 하니 주소를 알려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궁금한 마음이 들었지만 더 묻지 않고 알려주었다. 

 

10월에 정말 작은 소포가 배달되었다. 놀랍게도 얇은 시집 한 권과 엽서가 들어있었다. '록다운 변호사들'이라는 제목의 시집은 팬데믹 상황에서 국선변호 등 공익활동 변호사들이 느낀 재판시스템 붕괴의 두려움, 노력과 애환을 담은 60여 편의 시를 담고 있었다. 판매수익은 취약계층을 위한 변호활동에 쓰인다니, 여러 권 구입하여 지인들에게 보낸 것 같다. 우울한 회색빛 맨체스터 그림엽서에 영국 판사는 휘날린 글씨로 "내년에는 대면으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고 썼다. 

 

팬데믹의 공포 속에 법원 문도 닫혔다가 누군가의 제안으로 비대면 재판이 시도되어 정착된 이야기가 여러 시에 표현되었다. "아이디어들이 빠르게 공유되고 / 모범사례(best practice)가 논의되어 / 재판기일은 계속되었고 / 모두가 맞추어 노력하였지"(11쪽 중) 

 

시집을 읽고 나니 그 판사가 어느 웨비나에서 그토록 영상재판의 장점과 효용을 강조했던 배경이 이해되었다. 당시 그는 증인이 법원 건물이 아닌 집에서 증언하니 훨씬 편안하게 말을 잘 하더라, 전자기록 화면을 공유하며 이야기하니 재판 집중이 더 잘 된다, 중간에 인터넷이 끊기면 휴정하고 옆방으로 옮긴다는 등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쏟아냈었다. 

 

인류의 창의력과 적응력은 선사 이래 여러 난관과 역경을 극복하는 힘이었다. 20세기 이후만 보더라도 세계대전, 자연재해, 테러, 금융위기 등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새로운 기술 진보와 민주주의 확산, 인공지능 등 발전과 혁신은 계속되고 있다.

 

매주 재판하는 법조인과 평생 한 건의 재판을 받는 당사자에게 재판 연기의 의미는 분명 다를 것이다. 기술발전을 이용해 재판시스템의 붕괴를 막고 권리구제와 법의 선언이라는 역할을 이어간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엠마 트레벳이 시집 서문에 쓴 문구를 인용하고 싶다.

 

 "창의적 생각의 힘은 법적 이슈의 해결을 돕는다(The ability to think creatively helps resolve legal issues)."

 

 

이의영 고법판사 (서울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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