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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臺에서

힙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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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친구들은 노래방을 좋아했다. 선후는 모르겠으나 다들 노래도 잘 했다. 반면 나는 음치라는 확고한 자아상이 있었다. 당시 노래방의 암묵적인 규칙은 앉은 순서대로 노래책자를 넘기고 한 곡씩 노래를 예약하는 것이었는데, 나에게는 그 순간이 고역이었다. 내가 택한 고육지책은 랩송을 부르는 것이었다. 어차피 노래를 해도 음정이 맞지 않는다고 하니, 처음부터 음정이 없는 노래를 하면 되지 않겠냐는 무지한 생각이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랩을 내레이션처럼 하는 재주가 있다고 넌지시 말하였으나, 나는 그 말이 자제를 요청하는 뜻인 줄 몰랐다. 아무튼 그런 까닭으로, 그 때부터 나의 음악 재생목록에는 항상 힙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요즘 힙합 음악에 대한 불만이 생겼다. 도무지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가 태반이다. 가사의 절반이 영어이고, 그나마 국어로 된 가사 부분도 깊이가 없고 유치하게 느껴진다. TV에서 새로 시작한 힙합경연프로그램을 보니, 온 몸을 뒤덮은 문신에 형형색색 물들이고 땋은 머리 하며 그 모습이 영 불량해 보인다. 요즘 인기있는 트롯 프로그램으로 채널을 돌리려다 문득,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있는 날 보며 "이것도 노래냐" 하시던 아버지에게 "이게 진짜 노래죠" 하던 일이 생각났다.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을 시쳇말로 '꼰대'라고 한다. 꼰대스러움은 어느 순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스며드는 모양이다. 나는 내가 꼰대스럽지 않음은 물론이고, 꼰대스러울까 걱정하는 것조차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내가 가진 기준에 대한 업데이트가 어쩌면 한참 전부터 잊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기준에서 벗어나 보이는 대상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진 기준이 낡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제대로 된 재판을 하기 위해서는 법만큼이나 사람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양식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내가 마련한 기준을 계속해서 사회의 변화와 견주어보지 않으면,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안이한 평가를 반복하는 권위적인 판단자가 될지 모르는 일이다. 오늘도 증인신문을 하면서 고개를 여러 번 갸웃거리고 나왔다. 혹시 내가 낡은 기준을 적용해서 달리 보인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본다.

 

 

황성욱 판사 (상주지원)

리걸에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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