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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의 사수(射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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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금융위기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을 무렵, 홍콩 소재 영국계 로펌에서 변호사 업무를 처음 시작하였다. 그런데 첫 날 배정된 사무실은 상상하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부담스럽게도 영국인 파트너의 방에서 책상을 마주하고 함께 근무하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드라마 슈츠에 나오는 하비 스펙터의 사무실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조용히 업무를 볼 수 있는 독방을 꿈꾸었던 나로서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국계 로펌에서 이렇게 시니어와 주니어 변호사가 같은 방을 쓰는 것은 매우 흔한 풍경이다. 1700년대 Articled Clerkship(수습변호사 과정)을 원류로 하는 법률 교육 시스템인 Traineeship(예비 변호사 과정)은 정식 변호사가 되기 전 2년 동안 선배와의 실무 교육이 필수이다. 자연스럽게 같은 방을 쓰면서 업무를 배워가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초임 변호사 생활은 숨쉬기조차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되는 듯 했다. 그러나 사수(射手) 파트너 변호사는 내가 작성한 모든 문서를 꼼꼼히 검토하고 수정하는 등 실무적인 가르침을 주는 것은 물론, 변호사로서의 자세도 성실히 지도해주었다. 나아가 삶의 훌륭한 조언자이자 친구가 되어 주었다.

 

수년 후 나는 귀국하였고, 어느덧 시니어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면서 해외 사무소의 예비 변호사들이 6개월 동안 서울에 상주하였고 그들과 방을 공유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방을 같이 쓰는 목적이 단순히 예비 변호사들을 육성하는 일방의 관계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히려 시니어 변호사들이 예비 변호사들에게 배우는 것이 많다. 그들은 더 효율적인 업무 방식과 신선한 아이디어를 패기 있게 제안하곤 한다. 서로에 대해서 피드백을 주는 시간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기회도 갖게 한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일하게끔 하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올해는 COVID-19로 인해 예비 변호사들이 서울을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 함께 방을 쓰면서 세대와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고 서로에게 활력소가 될 수 있었던, 그리고 가까이서 챙겨주는 고마운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리운 요즘이다.

 

 

김다나 외국법자문사 (허버트 스미스 프리힐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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