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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臺에서

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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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는 순둥이입니다. 등록금 벌겠다고 몇 달을 밤잠 못 자고 아르바이트했건만 돈을 다 못 받았습니다. 점주에게 떼인 돈이 100만 원입니다. 20년 전 가난한 대학생에게 100만 원은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100만 원에 흥분한 나는 노동청이든 경찰서든 하다못해 동사무소에라도 신고해서 받아주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나는 명색이 법대생이었습니다.

 

왈수형은 기인(奇人)입니다. 공부 빼고는 모르는 것도, 못 하는 것도 없습니다. 축제 때 다들 말리는 데 기어이 불춤을 추다가 학교를 태울 뻔도 했지만, 기죽는 법은 없습니다. 적당히 속물이고, 적당히 현자여서 고민 상담을 하면 늘 사이다 같은 답을 주었지요. 이별에 상심한 후배에겐 "걔는 지금 새 애인이랑 열심히 라면 먹고 있을 거야"라며 위로해주었던 마음 따뜻한 형이었습니다. 성수 이야기를 들은 왈수형은 단박에, "그거 못 받아. 잊어버려"라고 합니다. 왈수형은 내가 알던 모든 법의 무용함을 들며 조목조목 설명했습니다. "니가 아직 물정을 몰라서 그래." 미처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내게 이 한마디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습니다. 나는 물정 모르는 법대생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법원권근(法遠拳近)의 이치를 깨친 것은 한참 뒤입니다. 하지만 재판만 하는 나는 여전히 세상과 격리된 온실에 사는 것 같습니다. 판사의 제일 덕목은 물정에 밝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염량세태(炎?世態) 같은 세상의 인심에도 무던해져야 합니다. 물정이 꼭 이재(理財)에 밝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알아야 할 것은 약자의 눈에 비친 세상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순둥이 성수들이 있고, 그들은 제 밥그릇조차 챙기지 못합니다. 심지어 빼앗겼는지도 모르고, 알았다고 해도 그간 숱하게 겪은 좌절의 경험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그런 성수들이 개발새발 쓴 꼬깃한 서면에 대고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록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정성은 물정에 밝아야 가능합니다. 

 

사법연수원에서는 다년간 여러 분야에서 경험을 한 신임법관들이 연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 경험이 보통사람들과 같은 생활세계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것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물정과 인심에 밝은 판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김태균 판사 (수원지법)

리걸에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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