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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신뢰의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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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넷은 마약, 총기, 아동 포르노, 장기 등 별별 불법적인 상품을 다 거래하는 어둠의 인터넷이다. 그 안에는 상품거래를 중개하는 수많은 온라인 사이트가 개설되어 있다. 구매자가 사이트 관리자의 에스크로 계정에 비트코인을 송금하면 관리자가 상품 배송을 확인한 후 비트코인을 판매자에게 송금하는 방식으로 대부분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일반의 적법한 전자상거래에서 구매자가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가격'이지만, 법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다크넷에서는 사이트 관리자의 '신뢰도'가 거래 성사의 관건이다. 관리자가 고품질의 마약이 정확하게 배송되도록 장기간 양심적으로 성실하게 거래를 관리해 왔다면 구매자는 기꺼이 다른 사이트보다 높은 값을 치른다. 그 가격차가 신뢰의 값이다. 다만 관리자의 어떠한 약속도 법적 구속력이 없으므로, 한 번의 부당거래만으로도 신뢰는 상실되고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레이첼 보스먼, 신뢰이동).

 

국가에 대한 신뢰는 국가에 강제력을 행사할 세계정부와 같은 상위권력기구가 없다는 점에서 다크넷에서의 신뢰와 일맥상통한다. 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있긴 하지만 그 또한 국가 시스템의 일부다. 국가의 국민에 대한 약속은 국가가 스스로 지키는 것일 뿐, 달리 이행을 담보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는 국민이 믿어도 된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 

 

국가가 신뢰를 높이는 방법은 이렇다. 형벌과 과세와 불이익처분에 관한 법률을 소급적용하지 않고, 국민에게 이익을 주기로 했으면 약속한 대로 이익을 주고, 법을 함부로 바꾸지 않고, 혹시 바꿀 필요가 생기면 미리 알려 충분히 논의하고 대비할 기회를 준다. 법에 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명확하게 해석하여 주고, 그 해석에 대한 믿음을 보호하고, 정부가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사법부가 적시에 바로잡아 주고, 정부는 그 재판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하면 국가는 신뢰를 잃는다. 

 

국민이 국가를 불신하면 어떻게 될까? 당장은 비과세이거나 죄가 되지 않는다 해도 언제 법이 바뀌어 과세되거나 처벌될지 모르니, 장기계획을 세울 수도 없고 투자에 나서기도 어렵다. 위험을 형량할 수 없으니 규제 리스크에 대비한 보험에 들 수도 없다. 국가가 정책목표를 수립하고 당근을 제시해도 나중에 진짜로 당근을 받으리라고 믿을 수 없으니 정책에 호응하지 않는다. 기업이라면 투자를 타국으로 돌릴 수 있지만 일반 국민은 그럴 수도 없다. 냉소주의만 만연해진다.

 

최근 소급입법의 소지가 있거나 신뢰보호 원칙에 반하는 법률들이 다수 발의되고 통과되었다. 그리고는 부진정소급이니 괜찮다거나 보호가치 있는 신뢰가 아니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그러나 법기술적인 논의는 제쳐두고, 이러한 법들로 인해 국민의 국가에 대한 신뢰가 손상됨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국가가 국민 한 사람의 신뢰를 배반하면 온 국민의 국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 국민이 믿지 못하면 나라는 바로 서지 못한다(民無信不立). 무리한 입법으로 얻은 눈앞의 이익이 과연 국민의 신뢰보다 값진 것일까.

 

 

한애라 교수 (성균관대 로스쿨)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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