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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유도된 수요와 대법관 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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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사법부 예산이 천억 원 증액된다면 어디에 써야 할까. 무엇이 시급한가. 그래 봐야 2조 원 조금 넘는 예산의 5% 정도 증가에 불과하지만. 재판에는 물적 시설보다는 인적 자원이 중요하다. 그러니 법관을 증원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어떤 법관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것이다. 혹자는 대법관, 어떤 이는 하급심법관. 1년에 4천 건 넘는 상고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대법관이 눈에 밟힌 분들은 대법관 증원, 고법 상고심사부 등 상고 사건처리에 초점을 맞추어 개선안을 제시할 것이다. 정원은 3천 명이 넘지만, 해외연수, 육아휴직, 외부 파견, 법원행정처 근무 등을 빼면 가동 법관은 이에 한참 못 미쳐 늘 사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는 법관이 안쓰러운 분들은 하급심법관 증원을 외칠 것이다. 야근도 하고 주말도 반납하지만, 사건처리 기간도 매년 길어져 신속한 재판의 원칙은 멀어져만 가고 있다. 

 

2018년 법원접수 건수는 658만 건이 넘는데, 민사 사건이 475만 건, 형사사건이 151만 건이니 소송당사자 수는 어마어마하다. 소송하거나 당하는 많은 시민을 생각하면 하급심 강화가 답이다. 대부분은 상고심과 무관하다. 그런데도 상고심 개선이 사법 정책의 핵심이 되고 거기에는 늘 대법관 수 늘이기가 우선순위에 오른다. 정부와 국회가 사법부 예산을 대폭 증액해 준다면 대법관뿐만 아니라 법관정원을 대폭 늘릴 수 있겠지만 사법부 예산편성권이 행정부에 있는 한 기대하기 어렵다. 판사 출신 국회의원이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수를 현행 14명에서 48명으로 대폭 증원하기 위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대법관 수가 늘어나면 상고심 사건에 더 많은 시간과 역량을 투입할 수 있게 되어 대법관의 과도한 사건 부담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신속하고 철저한 사건처리를 통해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 개정안 취지다. 유도된 수요의 역설(일명 '루이스-모그리지 명제')이 떠오른다. 교통혼잡을 해결하려고 도로를 확장했더니 교통량도 따라 증가해 도로건설의 효과가 곧 반감된다는 현상을 말한다. 차선이 늘어나면 소통이 잘 될 거라 여겨 다른 도로 이용자들이 모여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사람들로 차를 끌고 나오니 그럴 수밖에 없다. 경제학의 유도된 수요 법칙이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법관이 늘어나면 소송당사자들은 상고사건이 신속하게 처리될 것을 기대하여 상고하게 될 것이고 변호사들도 이를 권유할 것이다.

 

상고사건이 폭증하니까 주로 사건처리에 능숙한 '서오남', '서판남'이 대법관이 된다. 대법관의 다양화는 꿈도 꾸지 못한다. 대법관을 증원해 다양화를 꾀하는 방법도 있지만, 상고사건을 줄여나가면서 대법관 구성의 다양성을 모색하는 것이 정도다. 대법관 1명당 인구수를 선진국과 비교해보면 대법관 수도 턱없이 모자라지만, 법관 1명당 인구수도 OECD국가의 2~5배에 이른다. 사건 과부하 속에서 제대로 된 재판을 기대하기는 난망이다. 패소자들의 불만과 불신만 커진다. 그러니 삼세번 받으면 나아질까 기대하게 된다. 하급심에서 재판의 질 저하는 판사 개인의 능력이나 성실성의 문제가 아니다. 절대적으로 충분한 심리가 불가능하고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사건 부담 때문이다. '좋은 재판'이란 1, 2심이 강화되어 당사자의 얘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절차와 과정이 존중되는 재판이다.

 

 

하태훈 교수 (고려대 로스쿨)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