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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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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없는 평등한 농민으로 구성된 캄보디아 민족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크메르 루즈의 지도부는 프랑스 유학파 출신의 지식인들이었다. 최고 지도자인 폴 포트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왕비였던 사촌의 후원에 힘입어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고, 크메르 루즈 정권의 복지부 장관을 지낸 이엥 시릿(Ieng Thirith)은 소르본 대학에서 셰익스피어 전공으로 캄보디아 최초의 영문학 학위를 받은 대학 교수였다.

 

최고의 지식인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이 크메르 루즈를 결성한 후 수백 만 명의 동족을 학살하는 비극에까지 이르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1950년대에 프랑스에서 유학하면서 현지 공산당에 가입한 것이 그 사상 형성의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국민들이 크메르 루즈를 지지한 주된 이유는 미국의 꼭두각시 세력이 쿠데타로 국왕을 축출한 데 대한 반작용으로 보일 뿐 그들의 사상이 광범위한 공감대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이 프랑스에서 영향을 받은 사상은 먼저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으로 대표되는 극단적 평등사상과, 국가와 정치가 구현하는 '일반의지'에 국민이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였다. 루소는 코르시카 헌법을 기안하면서 국가가 국민의 경제적·사회적 삶을 검소하고 반(反) 도시적으로 통제하는 국가를 구상하였는데, 크메르 루즈는 이에 따라 도시민을 농촌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앙가주망(engagement)', 즉 지식인의 현실참여를 주장한 장 폴 사르트르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사르트르의 행동주의는 압제자의 폭력에 맞서는 피압제자의 폭력까지 정당화하는 것이었고, 이는 크메르 루즈의 '의심스러울 때는 제거하는 정책(To keep you is no gain; to lose you is no loss)'으로 구현되었다. 

 

후일 ECCC의 재판정에서 그들은, 크메르 루즈의 이론을 정립하고 전파한 것 외에 실제로 현장에서 벌어진 학살행위에 대해서는 구체적 인식이 없었다는 주장을 폈다. '에밀' 등을 통해 근대 교육론의 기초를 수립한 루소가 다섯 명의 아이들을 태어나자마자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 버린 일화는 유명하고, 사르트르는 '안락의자에 앉아 역사를 창조하려 한다'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다채로운 여성편력 외에는 직접 행동하는 일이 드물었다. 이들을 추종한 크메르 루즈 역시 획득한 권력을 누리려 하였을 뿐 자신들의 유토피아가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고 이로 인해 개개의 인간들이 어떠한 고초를 겪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태도를 취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모든 지식인이 위선적인 것은 아니었다. 가령 조지 오웰은 이데올로기나 사회공학보다 구체적 인간의 존재를 더 중요시했다. 그는 젊은 시절 버마에서 식민지 관리로 근무하면서 느낀 자괴감과 인간애를 바탕으로 영국의 빈민·노동자들과 함께 살았으며,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큰 부상을 입었다. 그가 말년에 쓴 '1984년'과 '동물농장'은 인간을 배제한 사상이 그대로 현실화되는 디스토피아를 그리면서 당시 지식인에게 인기 있던 공산주의, 대중에게 인기 있던 파시즘을 모두 비판한다. 

 

조지 오웰은 그가 꿈꾸는 혁명 후에도, 웃기는 말털을 뒤집어 쓴 판사가 장중한 재판을 거쳐 반역자를 처벌하거나 또는 무죄 방면할 것이며, 법은 국가 위에 있다는 신념은 유지될 것이라고 하였다. 시대를 휩쓰는 '일반의지'로부터 구체적 인간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독립된 사법부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EC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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