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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프리즘

휴정기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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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상선의 항해사로 근무할 당시에는 변호사는 소위 '전문직'이어서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선은 목적지를 향해 24시간 운항을 하므로, 그나마 항구에 정박해서야 제대로 쉴 수가 있다. 상선 중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부정기선(不定期船)에 주로 근무하다보니 3년 간 50개국이 넘는 곳들에 입국할 수 있었고,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었다.

 

북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튀니지의 한 도시에서 강도를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뉴질랜드에서 일조량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인 왕가레이에서 스카이다이빙을 즐기기도 하는 등 다양한 경험들을 하면서 외국으로 여행을 가는 것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변호사가 돼 로펌에 입사하고 보니, 로펌의 변호사는 매주 열리는 각급 법원의 재판에 참석하고 다양한 회사에 시기적절하게 법률자문을 제공해야 하는 등의 이유로 휴가를 쓰고 외국에 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휴가를 연달아 쓸 수 있고 법원이 1년에 두 번 공식적으로 쉰다는 '휴정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변호사가 된 첫 해의 휴정기에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내에서 휴가를 가졌는데, 수시로 전화가 오거나 이메일을 확인하고 회신해주는 통에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다른 해의 휴정기에는 외국으로 여행도 가보았는데,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인터넷으로 이메일을 쉽게 확인할 수 있어 일을 놓기가 쉽지 않았고, 휴정기에 인터넷이 잘 되지 않는 쿠바로 여행을 가라는 선배들의 우스갯소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올해의 휴정기는 전 세계에 유행하는 코로나19 사태로 변호사들이 외국으로 여행을 쉽게 갈 수 없게 된 생경한 풍경이 보인다. 

 

이에 아쉬운 변호사님들도 많겠지만, 연차가 쌓이니 이제 휴정기에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어도 그리 아쉽지만은 않다. '휴정기=여행'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 바쁘다는 핑계로 가장 중요한 것들을 회피하지 않았는지 돌이켜본다. 바쁘다는 말은 '중요한 것들을 간수하는 부지런함'의 핑계일수도. 의뢰인이 이번 휴정기에 연락이 오면 감사한 마음으로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관계의 미학을 여유롭게 즐겨볼 생각이다.

 

 

성우린 변호사 (법무법인 대륙아주)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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