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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실체적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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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스캔할 수 있는 궁극의 기계가 발명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심리에 꼭 필요하다면 본인의 동의가 없더라도 뇌 스캔 영장을 받아 원고, 피고, 피의자, 피고인, 증인에게 이 기계를 사용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법조인은 주저 없이 안 된다고 답할 것이다. 

 

피의자는 진술을 거부하지만 변호사의 상담일지에는 사건에 관해 피의자가 털어놓은 모든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이 상담일지를 압수해서 증거로 쓸 수 있을까? 그렇게 못 하도록 법은 변호사의 압수거부권과 증언거부권을 명시하고 있다. 

 

원고가 아파트 매매대금으로 10억원을 청구하고 피고도 다투지 않지만 실제 매매대금은 12억원이라는 확신이 들 경우, 판사가 피고에게 12억 원을 지급하라고 명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게 바로 처분권주의와 변론주의다. 

 

실체적 진실 발견은 사법절차에서 유일한 가치도 아니고 지고의 가치도 아니다. 내면적 양심의 절대적 자유, 사적 자치와 자기 책임의 원리, 청문권과 변론권, 자기부죄 금지와 진술거부권,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 다른 가치가 엄연히 존재하고, 이들 가치와 실체적 진실 발견이 충돌할 때 후자는 양보해야 한다. 그럼에도 법원은 때로 이 점을 망각하고 실체적 진실 발견을 최우선에 놓는다. 

 

실력 있고 헌신적인 판사가 당사자나 소송관계인의 절차적 권리를 과감히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 그럴까? 그 바탕에는 객관적이고 단일한 실체적 진실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어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바로 정의의 실현이라는 신념이 깔려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실체적 진실 발견이 최고의 정의라고 믿게 되면, 진실 발견을 위한 증거 확보에 방해가 되는 절차적 고려사항은 일부 생략해도 된다. 심리 결과 진실이 무엇이라는 심증을 형성하고 나면, 더 이상 입증 기회를 주는 것은 재판의 불필요한 지연일 뿐이다. 판사의 심증과 다른 진술을 하는 당사자나 증인은 거짓을 말하고 있으니 야단치고 바로잡아야 한다. 당사자에게 조정에 응하라고 압박하거나 당사자가 주장하지 않은 내용을 판결에 쓰는 것도 판사가 발견한 실체적 진실에 따른 정의의 실현이 된다. 

 

그러나 법원이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해 다른 가치를 희생하는 순간, 당사자는 절차의 주체가 아니라 진실 발견의 객체로 전락하고, 당사자의 권리 보호를 위한 여러 장치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하물며 판사가 발견했다고 믿는 진실이 정말로 진실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존 롤즈가 '정의론'에서 절차적 정의를 주장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얼마 전 또다시 변호사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마 그 영장은 실체적 진실 발견이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보다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발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이 절차 너머에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적법절차 내에서만 진실이다.

 

 

한애라 교수 (성균관대 로스쿨)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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