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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Call Me by Your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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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국적을 가진 재판소 동료들과 각자의 모국어를 주제로 자주 대화를 한다. 그 중 몇몇은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고 필자를 상대로 자신의 실력을 시험해 보기도 한다. 언젠가 호주 인턴 한 사람이 차를 타고 같이 이동하면서 인터넷을 통해 배운 것이 분명한 한국어로 필자와 대화를 시도하였는데 때마침 동승한 한국인 인턴이 기겁하면서 이를 말렸던 적이 있다. 그가 필자에게 구사한 한국어는 모두 친한 친구에게나 사용하는 반말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배워 보겠다는 외국인에게 선뜻 이를 권유하지 못하는 이유는 존대법 때문이다. 다른 언어에도 있는 존대 표현 자체야 배울 수는 있겠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어떠한 맥락에서 사용하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란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의 존대법은 나이나 지위를 비롯한 대화자 사이의 서열 차이를 전제로 하는데, 나날이 복잡·세분화되어 가는 것으로 보이는 한국의 서열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장류진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 첫 머리에서 묘사된 것처럼, 실리콘 밸리를 따라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직원들이 모두 영어로 이름을 만들어 부르는 판교의 어느 스타트업 회사에서도 그 방침을 만든 대표이사에 대해서는 "데이빗 님(David nim)께서 말씀하신 …"과 같은 존칭의 사용이 당연시 된다. 계급타파를 목적으로 전 세계 공산국가에서 사용하는 'Comrade'도 북한에 오면 상하관계에 따라 동지와 동무로 분화된다. 존대법이 없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예수가 존댓말을 하여야 하는지 반말을 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논쟁이 오랜기간 계속되고 있는 사정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히딩크 감독이 축구 국가대표팀에 요구한 것처럼 서로 모두 반말, 즉 평어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항상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필자는 후자를 선택하였는데 가끔 후배들로부터 "제발 저한테는 말씀 편하게 하세요"라는 불만을 듣는 것을 보면 이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핵심은 구체적 존대법의 적절한 사용 여부가 아니라, 나이나 지위 등에 상관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이에 따라 어법도 점차 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l'Autre)의 윤리'는, 전통적 서구 철학이 해왔듯이 주체적 자아의 관점에서 타자를 평가하거나 파악하려 하기보다, 타자가 전적으로 나와 다르다는 전제에서 겸허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타자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편 자끄 데리다는 법(droit)과 정의(justice)의 모순(aporia)으로서, 결정불가능한 것을 결정하여야 한다는 점, 정의는 현존하지 않지만 그에 따른 결정은 즉시 필요하다는 점 등을 들었다. 이처럼 법적 관점이라는 작은 렌즈만으로 알 수 없는 타자를 파악하고 나아가 재단까지 하려는 시도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국제재판법정에서 피고인을 비롯한 모든 참여자들을 '미스터'나 '미즈'를 붙여 성명으로 부르는 관행에 어느덧 익숙해지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그들을 '피고인', '증인', '변호인' 등의 지위로만 부르는 관행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다. 법정에서도, 파악 불가능하고 유일무이한 존재인 타자를 그대로 받아들여 존중하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인다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정의'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EC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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