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서초포럼

피해자의 덕목

161586.jpg

살다 보면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훌륭한 피해자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성폭행 사건을 보자. 피해자가 학생이라면 친부모가 모두 계시는 단란한 가정의 모범생으로서 학교와 집만 오가야 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하며 품행이 방정해야 하고, 연애질 같은 걸 해서는 안 된다. 직장인이라면 건전한 직종에 종사해야 하고, 회식에 따라가서는 안 되며, 어쩔 수 없이 따라갔어도 만취해서는 안 된다. 평소 상사나 동료에게 상냥한 웃음을 던져 잘못된 신호를 줘서도 안 된다. 정조는 목숨보다 중하므로 가해자가 성폭행을 시도한다면 결사적으로 저항하되, 과도하게 저항함으로써 가해자의 혀를 끊는 등 영구적인 상처를 남겨서는 안 된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가해자의 인생을 불쌍히 여기고 가해자만 믿고 살아온 그 가족의 처지도 생각해서 순순히 합의도 해줘야 한다. 꽃뱀이 되지 않으려면 합의금은 조금만 받아야 한다. 아, 그리고 너무 나이가 많아도 안 된다.

 

피해자의 유족이 갖추어야 할 덕목도 만만치 않다. 장례식장에서는 슬퍼하되 품위를 지켜야 하고, 문상 온 정치인이나 공무원에게 떼를 쓰거나 책임을 추궁해서는 안 된다. 시신 발굴은 국익을 고려하여 적당한 선에서 포기해야 한다. 유족 단체를 만들면 유족이 무슨 벼슬이냐는 말을 듣게 되니 섣불리 단체를 조직하지 않아야 한다. 혹시 유족 단체에 가입했다면 아무리 생계가 어려워도 개별적으로 보상을 받지 말아야 한다. 대의를 잊은 채 죽은 가족을 팔아먹었다고 비난받을 수 있다. 재발 방지를 위한 법률에 문제가 생기면 잘못은 국회가 했더라도 욕은 유족이 먹으니, 입법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피해자의 덕목을 갖추지 못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주위의 손가락질, 반강제적인 퇴사나 전학, 신상 털기와 악플은 말할 것도 없고, 손해배상금도 과실상계니 책임제한이니 하는 이유로 대폭 깎일 수 있다. 가해자가 무죄나 집행유예, 상당한 감형을 받게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권선징악 구도에 빠져든다. 착한 피해자를 위해 악한 가해자를 응징하는 것이 정의라고 믿어, 무작정 피해자는 천사화하고 가해자는 악마화한다. 그러다가 피해자가 착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발견되면, 그 순간 돌변하여 오히려 피해자에게 비난을 퍼붓기 시작한다. 

 

그러나 처벌과 피해 전보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얼마만큼 착한지가 아니라, 가해행위가 얼마나 중한가, 피해자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가, 어떤 처벌을 가해야 다시는 남에게 그런 고통을 주지 못하게 될까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피해자에게 엄격한 잣대를 갖다 대기 전에 최규석의 웹툰 '송곳'에서 구고신이 한 말을 기억하자. "당신이 지키는 것은 인간이오. 착하고 순수한 인간이 아니고, 비겁하고 구질구질하고 시시한 그냥 인간. 선한 약자를 위해 악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 피해자의 덕목을 못 갖춘 피해자도 피해자고, 그들의 권리도 똑같이 소중하다.

 

 

한애라 교수 (성균관대 로스쿨)

리걸에듀

관련 법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