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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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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 작가가 쓴 장편소설 '칼의 노래'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으로 남해안에 내려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원균이 지휘했던 조선 수군이 칠전량 전투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폐허가 되어버린 섬들에 봄이 오는 풍경을 보며 독백하는 장면이다.

 

작가가 소설의 첫 문장을 여러 번 고쳐 쓴 사실은 각종 인터뷰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작가는 처음에 '꽃은 피었다'라고 썼다가, 며칠을 고민하여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 썼다고 고백했다. 전자는 꽃이 피었다는 사실을 바라보는 자의 주관적인 정서가 담긴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것이고, 후자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인 사실만이 담긴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것이라고 했다.

 

재판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변호사가 매일 법정에 나와 판사에게 청산유수의 말을 쏟아내는 모습만 상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변호사는 의뢰인을 대리하여 법정에 나와 '말'이 아닌 '글'로서 판사를 설득하거나, 의뢰인 회사의 법률적 리스크를 예방·대응할 수 있는 의견을 담은 '글'을 제시하여 운영진을 설득하는 모습이 좀 더 실상에 가깝다.

 

그래서 필자를 비롯한 변호사들은 매일 김훈 작가와 같은 고민에 빠진다. 김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례로 법적인 판단에 근거가 되는 사실관계를 진술하려면 '사실의 세계'속에서 서면에 최대한 감정을 빼면서 문장을 써야 하고, 피고인의 행위에 선처를 구하는 진술을 하려면 '정서의 세계'속에서 서면에 감정을 듬뿍 담은 문장을 써야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모니터 앞에 놓인 서면과 의견서들이 퇴고를 기다리고 있다. 기본적으로 맞춤법이 맞는지부터 시작해 주술관계 상응 여부, 각 문장의 흐름과 맥락은 깔끔한지 등 점검해야 할 부분이 수 없이 많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지만 각 단어와 문장이 모여 나를 믿고 맡겨준 의뢰인의 권익을 제대로 보호할 수만 있다면,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글쓰기는 할 때마다 어렵고, 직업 특성상 평생 글쓰기를 해야 하지만, 내 글은 그들로 인해 생명력을 얻어 살아 숨 쉴 수 있다.

 

 

성우린 변호사 (법무법인 대륙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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