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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의 홍수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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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 고시잡지에서 사법시험 채점위원의 채점평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는 쟁점에 관한 대법원의 판례의 태도를 적는 훌륭한 수험생도 있었다면서 칭찬했다. 약 10년 후 고시잡지에 게재된 다른 채점평을 읽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일관된 대법원의 판례가 있음에도 이를 알지도 못하는 수험생이 있었다고 질타했다. 90년 초에 출판된 법학 교과서와 비교할 때 최근 교과서들은 그 페이지수가 급격이 증가했다. 거기에는 그동안 내려진 중요한 판례가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판례의 규범력에 관한 논쟁을 떠나, 판례가 적어도 사실상 재판의 기준으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법률가가 문제 해결을 위해서 관련 판례의 법리를 검색하고 숙지하는 것은 필수적인 덕목이 되었다. 

 

매년 다양하고도 수많은 판례가 쏟아지고 있고, 그러한 판례는 IT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손쉽게 검색·활용되고 있다. 법률가가 되려는 로스쿨생들이 학습해야 할 판례의 양 역시 어마어마하게 커져버렸다. 학생들은 이 같은 판례의 홍수 속에서 기계적으로 학습하여 소화하기에도 벅찬 상태다. 

 

최근 로스쿨에서 과도한 판례학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표준판례를 선정하는 작업이 일부 결실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는 분명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과다한 판례에 관한 기계적인 학습의 부담 때문에 소홀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판례를 단순히 많이 외우기만 한다면 이에 해당하는 사건에 대한 해답을 바로 알 수는 있겠으나, 유사한 사례에 관한 판례가 없는 사건에 대해서는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지 갈피를 못 잡게 될 수 있다. 

 

실제로 로스쿨 학생들은 명확한 판례가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려운 논증이 포함된 경우에도 비교적 정확하게 답을 제시하는 편이나, 판례가 없는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를 매우 어렵게 여기거나 논리적 구성을 잘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계적인 판례의 학습 이면에는 가장 기본적인 법학적, 논리적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훈련이 소홀히 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공부해야할 판례를 줄이는 노력과 동시에, 사실관계를 분석하고 법리를 적용하여 타당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른바 '리걸마인드'를 체화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이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박광서 고법판사 (수원고법)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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