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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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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CC 부임을 앞두고 몇몇 분들로부터 가족과 떨어져 타국에서 혼자 생활하게 될 텐데 밥은 누가 차려주냐는 걱정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필자의 생각과 달리, 객관적인 시각에서는 혼자서 밥도 못 찾아 먹는 한국의 ‘표준’ 중년 남성상, 이른바 ‘맨박스(Manbox)’ 내에 머무르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ECCC의 재판부 구성원 중 계약직 컨설턴트는 2년이상 고용할 수 없고, 열악한 근무 환경 탓에 이직률도 높다. 따라서 수시로 채용절차를 진행하는데, 표준 모집공고에 여성 지원장려 조항(Applications from women are strongly encouraged)이 포함돼 있어 같은 조건이면 여성을 채용하게 되므로 재판부 구성원 중 여성의 수가 압도적이다. 필자는 부임하면서 젠더에 관한 필수 교육(I Know Gender)을 이수하였음에도 무심코 우리 팀은 여섯 명(six men team)이라고 말했다가 동료로부터 즉시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UN재판소라고 하여 양성평등이 문제 없이 구현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필자가 속한 재판부의 재판관이나 재판소 내 주요부서의 최고관리자는 모두 남성이다. 국제형사법 분야 또한 예외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파리 시민들이 독일에 협력한(collaboration horizontale) 여성들을 거리로 끌어 낸 후 삭발을 한 사례가 시사하듯이 전쟁에서 여성의 모습은 지워졌고(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여성이 관련된 전쟁범죄는 오랜 기간 관심 밖이었다. 그나마 ECCC에서는 크메르루즈가 줄어든 인구의 회복을 위해 실시한 강제결혼(Forced Marriage)의 범죄 해당 여부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남과 여 모두 피해자라는 점에 특색이 있다.

 

한편 스티븐 핑커는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를 통하여, 전쟁을 비롯한 인류의 폭력성이 크게 감소하고 평화를 추구하게 된 역사적 추동력 중의 하나로 ‘여성에 대한 존중(Feminization)’의 증가를 꼽는다. 설득력 있는 견해이기는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전체적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그의 희망찬 결론에 선뜻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약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그 시대 익명의 작가는 대부분 여성이라면서, 여성이 글을 쓰려면 돈과 자신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여성해방에 대한 반대의 역사는 여성해방 그 자체의 역사보다 더 흥미롭다고 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산 선구적 여성 작가 나혜석은 공개 이혼 선언 후 일감을 얻지 못하여 결국 행려병자로 삶을 마쳤으나, 그 후 우리나라에서도 스스로의 생계 수단과 공간을 확보한 여성들이 점점 더 크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고, 그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거센 ‘저항(Backlash)’과 ‘재반격(Reboot)’이 이어지고 있다.

 

UN은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것을 막기에도 힘이 부치는 상황이다. 다만 현재 세계적으로 진행 중인 여성의 권리 확산이야말로 세상이 느리지만 점차 더 나아지고 있다는 드문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어떠한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따라온 것이 아니라, 거센 저항에 맞선 일부의 믿음과 희생을 바탕으로 쟁취되어 온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EC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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