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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한번 잘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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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한번 제발 속 시원하게 말해보고 싶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부산역 지하철 자동매표기 앞에서 난생 처음 외국인으로부터 영어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무슨 역으로 가고 싶은데 어디서 어떻게 환승해야 되냐는 것이 질문 요지였습니다. 그 순간 대학 입시 수학시험 1번 문제를 봤을 때와 같이 머리가 백짓장처럼 하얘지고, 입술은 접착제를 붙여 둔 것처럼 떨어지질 않아, 황급히 도망(?)을 갔었습니다.

 

그때의 쓰라린 기억은 심지어 국외훈련 기회를 얻어 미국에 가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나마 국외훈련을 위해 공부를 하며 배운 얄팍한 실전 영어로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영어로 말하기 전에 미리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그려본 다음 실전에 임하는 기법으로 인터넷 설치하기, 가스와 수도 연결하기, 대학 구내식당에서 여러 채소들 섞어서 샌드위치 주문하기 등 각종 난관을 하나씩 헤쳐나갔습니다.

 

그러나, 큰 아이 유치원 행사 참여하기, 지도 교수와 면담하기, 지역 검찰청에서 2개월 인턴하기 등 고급 과정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 검찰 실무를 조금이라도 더 알려고 관계자들 면담할 때 A4 용지에 영어로 시나리오를 잔뜩 적어 인터뷰를 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레 잡힌 미국 검사들과의 점심식사 자리에서 쏟아지는 small talk의 폭격 앞에서 당해낼 재간은 없었습니다. 

 

아리랑 TV를 1년 동안 봐도 잘 안들리는 영어 실력, 넷플릭스 드라마를 영어자막을 틀고 봐도 잘 안들리는 영어 실력에 자꾸 움츠러듭니다. 그래도 ‘영어 독해는 자신있어’라고 생각하며 샀던 반지의 제왕, 코스모스 같은 명저들도 책장의 일부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된 지 오래입니다. 영어 강요 사회의 다 닳은 부스러기 같은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영어가 안들리고 말못하는 고통에 시달리는 많은 분들과 동류 의식을 느끼고 공감합니다. 세종대왕님을 뵐 면목은 없으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영어에 매진하는 모든 분들과 아픔을 함께 하렵니다.

 

 

권상대 부장검사 (제주지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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