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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臺에서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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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남매를 기르신 아버지는 내가 어린 시절 약속의 중요성에 대해 무척 진중하게 말씀하셨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되는 말씀의 요지는 이랬다.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은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씀은 나의 성장기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내가 세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가 되어서는 아이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전달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작은 약속을 하기 전에도 우선 지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지키지 못할 요청인 경우에는 아무리 애교를 부리며 애원해도 단호하게 거절을 하곤 했다. 

 

하지만 매번 약속을 틀림없이 지킨다는 건 말처럼 쉽지가 않다. 한 번은 물놀이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막내가 피곤한 금요일 저녁 퇴근해 오자마자 당장 사우나에 가자고 졸랐다. 나는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으니 내일 가자”는 말로 달래며 ‘약속’을 했는데 막상 다음 날이 되자 너무 피곤해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부터 조르는 막내에게 “조금만 있다 가자”를 반복하다 결국 “너무 피곤해 못가겠다”고 해버렸다. 그러자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내뱉는 다섯 살 막내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약속했으면서….”

 

철저한 사건관리가 핵심인 미국의 소송절차에서 재판부는 기한이 정해진 소송행위에 대해 당사자에게 매우 엄격하게 그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정해진 기일을 아무 변경요청 없이 지키지 않는 것은 사실 거의 소송을 포기한 경우에나 가능하다. 변론기일이 수회에 걸쳐 이어지는 우리 소송절차에서도 재판부와 당사자, 대리인은 준비서면이나 증거자료의 제출은 물론 석명사항에 대한 답변, 증거채부 결정, 선고기일의 지정 등 서로 기한을 정하여 약속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종종 실망으로 끝나고 만다. 

 

소송절차에서도 서로 약속을 잘 지키고 혹여 지키지 못할 사정이 생기면 미리 충분한 설명으로 양해를 구해 서로 신의를 쌓아가는 문화가 우리 법정에서도 확립되어 갔으면 참 좋겠다. 다음 주에 선고하기로 약속한 복잡한 결심사건을 보면서 나부터 마음을 다잡아 본다.

 

 

김영기 판사 (서울중앙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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