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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법조

남아공 헌법재판소 'HIV 보균자의 채용탈락은 평등권 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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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은 인종 및 성 차별을 구조적으로 정당화하는 이른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책으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 받아온 나라이다. 무려 반세기 동안 인종분리정책을 추진했던 남아공은 1994년에 이르러서야 인종 차별 철폐를 선언한다. 민주화 이후 넬슨 만델라 정부는 불평등의 법적 정당화로 인한 반목과 분열의 역사를 뒤로 하고, 새로운 헌법적 질서를 세우는 것을 국가적 과제로 삼아왔다. 새 정부는 새로운 헌법 제정과 개별 기본권에 대한 구체적인 보장을 통해 법치주의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위와 같이 남아공 사회에서 헌법의 우위에 입각한 새로운 정부의 구성이 요청된 배경 자체가 뿌리 깊은 인종·성별 간 차별을 법률로서 정당화해왔던 역사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남아공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기본권 중에서도 특히 평등권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남아공 헌법재판소의 Kriegler 재판관의 말을 빌리자면, 남아공 헌법은 평등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평등은 남아공 헌법의 핵심이자 설립 원리이다. 남아공 헌법에 규정된 평등권의 내용은 국가 권력에 의한 차별과 억압에 대한 반성이다. 동시에 차별 철폐에 대한 만델라 정부의 강력한 의지의 표상이기도 하다.

남아공의 평등권 조항은 특히 차별금지에 관하여 자세하게 규율하고 있다. 차별금지에 관한 남아공 최종헌법 제9조 제3항은 “국가(The state)는 누구든지 인종, 젠더, 성별, 임신 여부, 혼인 여부,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피부색, 성적지향, 연령, 장애 여부, 종교, 양심, 신념, 문화, 언어 및 출생 여부를 포함한 하나 이상의 사유를 근거로 하여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불공정하게 차별하여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16가지에 이르는 이 사유들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차별은 허용될 수 없다는 남아공 헌법의 의지를 드러낸다.

열거된 사유들만으로도 그 내용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다양한 양태의 차별에 관하여 헌법에 위반된다고 선언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남아공은 위와 같은 광범위한 차별금지사유의 명시에 만족하지 않고 헌법이 금지하는 차별 사유들의 범위를 확장하는 법리를 발전시켜왔다. 남아공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사법부는 최종헌법 제9조 제3항에 “…를 포함한 하나 이상의 사유를 근거로 하여”라는 문구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조문의 해석을 열거된 16가지 사유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인간 존엄성에 손상을 입힐 가능성 또는 심각한 수준의 불이익을 초래할 가능성과 관계된다는 측면에서 열거된 사유들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사유들을 이른바 ‘유사 사유(analogous ground)’로 본다. 이에 근거한 차별은 헌법이 금지하는 ‘불공정한 차별(unfair discrimination)’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유사 사유에 의한 불공정한 차별의 개념이 인정됨에 따라, 남아공 헌법재판소에서는 헌법 문언에는 명시되지 않은 다양한 차별금지사유에 근거한 차별이 불공정한 차별로서 평등권 침해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다음에서 소개하는 Hoffmann 사건{Hoffmann v South African Airways (CCT17/00) [2000] ZACC 17; 2001 (1) SA 1; 2000 (11) BCLR 1211 ; [2000] 12 BLLR 1365 (CC) (28 September 2000)}은 ‘HIV 감염여부’가 유사 사유로 인정될 수 있는지에 관한 결정이다.


2. 사실관계

Hoffmann은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 보균자이다. Hoffmann은 공공기관 Transnet의 자회사인 South African Airway(SAA)의 항공승무원직에 지원하여 최종면접까지 거쳐 채용대상자 12명 중 1명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건강검진 과정에서 HIV 보균자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를 이유로 최종 탈락했다. Hoffmann은 SAA가 자신을 탈락시킨 것은 의학적 근거 없이 HIV 보균자인 지원자를 다른 지원자와 차별하고, 이미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HIV에 감염된 자와 신규채용대상자 중 HIV에 감염된 자를 불공정하게 차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자신의 평등권, 인간 존엄성, 동등한 근로 기회가 침해되었다며 법원이 SAA에게 자신을 승무원으로 고용해줄 것을 명령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SAA는 HIV 보균자를 채용하지 않는 정책은 승객의 안전과 의학적 측면, 운영의 측면에서 형성되어 온 고용 관행(employment practice)이라고 주장하였다.


3. 헌법재판소의 판단

불공정한 차별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관하여, 재판부는 HIV 보균자가 사회에서 소수자이며, 강한 편견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재판부는 사안에서의 채용 탈락과 같은 HIV 보균자에 대한 사회의 반응이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상태를 밝히지 못하도록 만들고 결국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게 했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HIV 감염 경로에 대한 의학적 견해가 분분함에도 불구하고, HIV 보균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이 만연한 점을 고려할 때, 어떠한 종류의 차별이라도 그들에게는 새로운 종류의 낙인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어 이와 같은 낙인은 곧바로 인간 존엄성과 연결되며, 따라서 이들에 대한 차별 취급은 제9조 제3항의 차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SAA가 채용 거부 사유로 든 ‘건강상의 이유’가 의학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나아가 병증의 정도에 따라 합병증에 대한 면역력이 다르고, 따라서 직무수행능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보균자라는 이유만으로 채용에서 탈락시킨 것 역시 타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또한 현재 승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면서 HIV 보균자인 사람과 신규채용대상자를 차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책의 목적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 역시 지적하였다.

이어 재판부는 SAA의 주장을 검토함에 있어, 상업적 목적은 직원을 채용함에 있어 중요한 고려요소라는 점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상업논리에 휩쓸려 적절한 의학적 근거 없이 HIV 보균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정형화하고 차별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승객들의 건강과 안전은 중요하고 SAA가 이를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신뢰도에 손상이 생기는 것은 분명하나, HIV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병 자체에 대한 깊은 히스테리를 불러왔다는 점에 더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무지와 공포는 HIV 보균자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데에 정당화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차별의 사유 판단에 있어 HIV 보균자라는 차별 표지가 최종헌법 제9조 제3항의 ‘장애(disability)’에 포함되는지, 따라서 SAA의 정책이 열거된 사유에 의한 차별인지 문제되었다. 이 문제에 관하여 법정조언자들은 HIV 보균자는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분류될 수 없다는 의견을 냈다. 재판부는 사안의 경우 인간존엄성을 손상하고 있음이 명백하므로 장애 포함 여부에 대한 판단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4. 판결의 의의

Hoffmann 사건은 HIV 보균자라는 지위가 사회 소수자 신분이라는 것을 우선 논증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소수자성(minority)이 인간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특성과 직결된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인간 존엄성 손상이라는 특질에서 ‘HIV 감염여부’라는 표지와 열거된 사유와의 공통점을 추출할 수 있으므로 유사 사유의 문제로서 헌법상 평등권이 문제되는 사안이라고 논증했다. 위 사안과 같이 유사 사유를 인정하여 헌법상 평등권의 보호범위를 넓히는 남아공 헌법재판소의 태도는 헌법이 금지하는 차별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권리구제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유형의 차별에 효과적으로 대응한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우리나라의 예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는 우리 사회 전반의 폐쇄적 성 문화로 인해 HIV와 같은 사회적 낙인을 유발하는 질병을 가진 사람들의 권리가 제대로 논의되기 어려웠다. 때문에 HIV 보균자에 대한 평등권 침해의 문제가 구체적인 사건으로서 문제된 경우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사회가 다변화됨에 따라 HIV와 같이 낙인 효과를 주는 질병이 가져오는 새로운 헌법적 문제들이 수면 위로 부각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병력 등에 의한 차별은 우리 사회에서 비교적 새로운 유형의 차별에 속하지만 헌법이 평등을 요청한 경우와 비교하여 헌법적 차원의 보호의 필요성이 결코 덜하다고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남아공의 사례는 헌법 문언으로 명시되지 않은 새로운 유형의 차별에 대하여 엄격한 심사기준을 적용하여 권리 구제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우리 헌법재판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HIV와 같은 병력을 비롯하여 인종, 민족적 출신(ethnicity), 성적지향 등 우리 헌법상 명시되어 있지 않은 사유들에 근거한 평등권 침해의 문제에 있어, 새로운 유형의 차별들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심사를 수행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전은주 책임연구관 (헌법재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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