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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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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로 개업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대기업, 국회, 은행, 대학, 시민단체, 연구소, 로타리, 카네기, 무슨 무슨 CEO 과정들, 동창모임, 지역 모임까지, 그동안 거쳐 왔고 또 지금 몸담고 있는 분야의 사람들과 저녁마다 약속이 있었다. 적극적으로 여러 모임에 가입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만큼 사건도 많아졌다. 일정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빼곡히 채워지고, 저녁약속은 두세개가 겹치기 일쑤였으며, 심지어 주말에도 경조사, 골프에 워크샵까지 일정이 빽빽했다.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갔고,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되었다. 하루는 유독 힘든 의뢰인의 ‘말바꾸기’에 대응하다가 스트레스를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지금 당장 어디로든 탈출하고 싶었다.


서울 근교의 사찰의 템플스테이를 검색해보고, 전화를 걸어 절에서 하루 밤만 좀 묵게 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뜬금없이 외박을 하겠다는 남편을 믿어주는 아내도 고마웠다. 갈아입을 옷도 세면도구도 챙기지 않고 양복차림으로 초저녁에 절입구에 도착하자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사무실에서 겨우 30분 거리를 운전해 왔을 뿐인데, 이런 곳이 있었다.

북한산 서쪽에 자리 잡은 천년 고찰은 고요해서 귀가 편안했다. 절에서 내어준 방은 작은 탁자 한 개,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라고 쓰여 있는 족자 외에는 텅 비어있는 정갈한 방이었다. 한지로 곱게 바른 창문을 열어보니 달빛이 은은했다. 이름 모를 산새 소리도 오랜만에 들으니 고향에 온 듯 반가웠다. 절에서 내어준 옷으로 갈아입고, 오롯이 혼자와 마주하는 시간이 좋았다. 나는 어디쯤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바라보았다.

돌아보니, 국회에 근무할 때도 아주 많이 지쳤을 때는 혼자 제주로 갔다. 바다로 가서 시원한 바람을 마주하는 것도 좋았지만, 한라산 깊은 숲 속을 몇 시간 걷다 보면 좀 살 것 같았다. 그렇게 힘을 얻고 또 서울로 올라가 몇 달을 버티곤 했었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하룻밤 동안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몸도 마음도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절에서 정성껏 차려주신 아침 공양을 먹고, 바로 서울중앙지방법원 10시 재판을 하러 길을 나섰다. 가는 길은 차들로 번잡했지만, 오늘 법정으로 가는 이 길은 어제의 그 길이 아니었다.


정지웅 변호사 (법률사무소 정(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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