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서초포럼

Usual Suspect

153391.jpg

ECCC에서 처음 사건기록을 검토하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진술조서(Proces-verbal)가 기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ECCC의 소송규칙(Internal Rules)은 캄보디아 및 프랑스 형사소송법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이른바 규문주의 방식(Inquisitorial system)에 따라 절차가 진행된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모든 증거에 증거능력을 부여하여 증거 판단을 전적으로 법관의 자유심증에 맡기고 있다.


많은 증인이 법정에 출석하고 증거를 둘러싼 복잡한 논쟁이 벌어지는 국제형사재판은 지나친 장기화가 문제로 지적되곤 하였는데, ECCC의 이러한 특색은 그 절차를 간소하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탄핵주의 방식(Adversarial system)에 익숙한 ECCC의 일부 구성원들에게는 모든 진술조서에 증거능력을 부여하고 그 증명력 판단을 법관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제도는 생소함을 넘어 부당하게까지 여겨지는 것 같았다. 사실 이러한 제도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인을 신문할 권리를 보장하는 국제규범[Art. 14(3)(c) ICCPR, Art. 6(3)(d) ECHR 등]에 어긋날 가능성도 있다.

그 결과 ECCC에서는 수사 과정에서 증인진술조서를 만들기 위하여 오랜 시간 공을 들였음에도, 이후 많은 사람을 다시 법정에 불러 증언을 듣는 바람에 절차가 중복되는 비효율을 낳았다. 다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수사가 중립성이 보장되는 수사판사에 의하여 대심적으로 이루어지고 피의자에게도 독자적인 증인신청권이 인정되며 수사판사의 증거조사나 결정에 대하여 불복이 보장되는 등 당사자의 권리를 보호할 장치가 다수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이른바 조서의 전문법칙에 관한 형사소송법 규정은 연혁적으로 영미법의 전문법칙(Hearsay rule)이나 독일법의 직접성 원칙(unmittelbarkeitsprinzip)과는 명백한 연결점을 찾기 어려운 독특한 것이다. 이는 프랑스 법에서 당연히 증거능력이 있는 수사판사 조서의 작성 권한 및 효력을 수사기관에까지 확장한 후 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권한 남용의 위험을 문서의 진정성립 이론을 빌려 통제하려고 한 창의적 시도로서, 일제 식민지 시기 직후의 현실적 한계를 반영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그 수명을 다하고 있다고 보인다.

던져버린다거나 휴지로 만든다는 등의 레토릭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부터 우리나라 형사소송에서 벌어지는 각종 문제의 주범으로 조서는 빈번하게 소환되어 왔다. 그러나 수사과정을 조서 등으로 기록하는 실무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피의자 신문 제도를 보면, 자기부죄금지특권이 있는 사람에 대한 임의 수사임에도 피의자의 권리 보장이 미흡한 상태에서 별다른 제한 없이 수사기관이 직접 행하면서 왜곡이 가능한 일방적 문답형식으로 정리, 기록한 뒤 이에 대하여 비교적 강한 증거법상의 효력을 부여하고 있는 등 수많은 태생적인 문제를 안고 있지만, 피의자의 진술을 어떤 형태로든 수사기관 등이 기록하여 재판에 제출하는 행위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서의 진정성립이란 틀은 전체 수사과정의 극히 일부만을 반영할 뿐이므로 이러한 낡고 불완전한 수단을 중심으로 하는 개선논의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이제는 조서의 작성과 증거제출 과정 전반에 걸쳐 당사자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될 수 있도록 그 바탕이 되는 제도 및 실무를 재설계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ECCC))

관련 법조인

리걸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