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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와 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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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법전에서 합의(合意)라는 말은 별로 쓰이지 않는다. 총칙·물권·채권편에서는 단 한 번 제631조에서 임대인의 동의를 얻은 전대차의 경우에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합의로 계약을 종료한 때도' 전차인의 권리는 소멸하지 않는다고 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친족·상속편에서도 제815조 제1호에서 혼인의 무효사유로 '당사자 간에 혼인의 합의가 없는 때', 제883조 제1호에서 입양의 무효사유로 '당사자 사이에 입양의 합의가 없는 경우'의 두 곳에서 사용됨에 그친다.

 

우리가 일상의 통상적 언어생활에서 ‘합의’라고 말하는 경우에 대하여 민법전은 협의(協議)라는 말을 쓰고 있다. 민법에서 ‘협의’는 그 사전적 의미대로 '여러 사람이 모여 서로 의논함'이라는 뜻(예를 들면 내가 좌우에 두고 보는 '연세 한국어사전'은 '비슷한 목적을 가진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공동의 의견에 도달하기 위하여 서로 의논하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대신 오히려 ‘합의의 사실’ 또는 ‘합의된 바’라는 의미로 쓰인다. 예를 들어 공유물의 분할에 관한 민법 제269조 제1항은 '분할의 방법에 관하여 협의가 성립되지 아니한 때에는 공유자는 법원에 그 분할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한다(상속재산의 분할에 관한 제1013조 제2항도 이를 준용한다). 친족·상속편에서는 ‘협의상 이혼’, ‘협의상 파양’이 규정되어 있다(제834조 이하, 제898조 이하), 또 상속재산의 분할에서도 일단 ‘협의상 분할’이 앞선다(제1013조). 그 외에도 부부의 동거장소의 결정에 관한 제826조 제2항, 이혼시의 재산분할에 관한 제839조의2 제2항, 혼인외의 자나 이혼에서 자에 대한 친권의 행사에 관한 제909조 제4항, 공동상속에서 기여분의 결정에 관한 제1008조의2 제2항에서도 마찬가지로 '협의가 성립하지 아니한 때' 운운한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제834조는 '부부는 협의에 의하여 이혼할 수 있다'고 정하는데, 이것은 서로 의논하는 과정을 밟기만 하면 이혼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합의로 이혼할 수 있다는 의미임이 명백하다. 이것은 가령 파양에 관하여 제899조 본문에서 '양자(養子)가 15세 미만인 때에는 [대락양자(代諾養子)에 관한] 제869조의 규정에 의하여 입양을 승낙한 자가 이에 갈음하여 파양의 협의를 하여야 한다'고 할 때 이 규정이 파양할 것인지 여부를 의논하여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파양의 합의를 하여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한다는 점 역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는 그 단서의 '입양을 승낙한 사람이 사망 기타 사유로 협의를 할 수 없는 때에는 생가의 다른 직계존속이 이를 하여야 한다'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민법전에서 합의를 표현할 때에는 대체로 협의라는 말이 쓰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협의의 사전적 의미는 앞서 말한 대로 '여러 사람이 모여 논의하는 것'이라고만 되어 있고, '여러 사람이 논의를 하여 합의하는 것 또는 그 합의'라는 뜻은 애초 나와 있지 않다. 우리는 흔히 '어떤 문제에 대하여 협의를 하였으나 결론은 못 내렸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민법전의 용어법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특히 제899조에서의 ‘협의’란 자칫 오해를 사기 쉽다.


이것은 '협의가 성립하다'라고 하여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일상에서 '협의가 성립하지 아니하였다' 또는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면, 이는 의논하는 자리 자체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뜻인가, 아니면 서로 의논은 해 보았으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인가? 졸견으로는 그 어느 쪽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그 한도에서 민법전의 용어 사용에는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본민법전에서는 ‘협의’라는 말을 ‘調う(토도노우)’라는 동사와 함께 쓴다. 그런데 '協議が調う'라고 하면, 이는 '협의가 성공하다', 그리하여 '일정한 합의에 도달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말에서는 '협의가 성립하다'는 것이 설혹 그러한 의미를 가지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합의가 성립하다' 또는 '합의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굳이 반드시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말을 쓸 이유는 없지 않을까? 뒤집어 말하면, '협의가 성립하다'는 민법전의 표현은 또 하나의 일본적 잔재인 것이다. 


이번에 법무부에서 민법전의 표현을 보다 알기 쉬운 용어와 어법으로 개정하는 작업을 마무리하였다고 하는데, 그 결과물을 보면 위와 같은 점은 고려조차 되지 아니한 듯하다.


양창수 석좌교수 (한양대·전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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