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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처지가 바뀌자 찾아온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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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검색하니 셀 수 없이 많은 관련기사가 뜬다. 직장의 갑을관계에서, 젠더 갈등에서, 학교폭력에서, 다문화사회의 차별에서, 좌우의 이념대립에서, 마주달리는 노사관계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어다. 갈등과 오해, 혐오와 대립의 해결책으로 역지사지를 주문한 결과다. 지금 패스트트랙으로 빚어진 국회의 극한 대치상황을 풀려면 여야가 서로 역지사지해야 한다고 정치평론가들이 훈수를 던진다. 역지사지·자아성찰 TV예능프로그램도 생겼다. 대표와 직원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역지사지’와 ‘자아성찰’을 시도하려는 기획이라고 한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본 것이 아니라 처지가 달라지니 비로소 깨달음이 왔음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변호사로 개업하자 몸담았던 조직의 흠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법조인도 그렇지만, 최근 검찰에 불려가거나 법정에 선 전직 판·검사들이 그들이다. 자신들이 수사대상이 되고 법정에 서 보니 인권감수성이 커져 전에는 보이지 않던, 아니면 보였지만 간과했던 문제들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제한 없는 검찰의 출석요구권의 위헌성, 인권 침해적 밤샘수사 관행, 무죄추정원칙은 간 데 없고 유죄로 추정되고 in dubio pro reo가 지켜지지 않는 현실, 수사기관이 흘리고 언론이 보도의 자유와 알권리를 근거로 피의사실이 낱낱이 공개되는 상황, 소환한 피의자를 포토라인에 세우는 검찰, 검사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이 인정되어 여전히 남아있는 조서재판의 관행,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로 등장한 검사의 공소장일본주의 위반 등이 그들이 제기한 목록이다. 피의자·피고인의 기본권과 방어권의 핵심사항들이다. 법을 잘 아는 전직 판·검사들이 지적하고 언론에서 이슈화되자 박상기 법무부장관은 지난해 10월 피의사실 공표, 심야 수사, 포토라인 관행을 없애는 방향을 검토하라고 검찰에 지시한 바 있다. 진즉 폐기되거나 개선되었어야 할 인권침해 요소들이다.

물론 그들이 현직에 있었을 때 문제제기가 쉽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입장과 처지가 바뀐 후에야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은 어쩐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로 꺼내 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지가 바뀌니 비로소 그들의 고통이 와 닿고 느껴지고 공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직에 있었을 때 입장 바꿔 생각해 보았다면 피의자·피고인의 인권보장 수준은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씁쓸하기만 하다. 그랬다면 수사의 오류와 인권침해를 줄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지금에 와서 과거를 들춰 재수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사법부가 만신창이 신세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사와 재판을 진행하면서 늘 상대 입장에 서보고, 때로는 피의자·피고인, 때로는 피해자의 처지를 상상해 봤으면 달라졌을 것이다. 판·검사 연수에서 인권감수성을 깨우고 높이는 교육훈련으로 역할연극을 해보지 않았어도 할 수 있는 입장전환의 상상이다. 그 상상 속에서 타인의 관점과 감정을 느껴보는 역지사지가 공감과 소통의 기본이기도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내재되어 있는 편견과 편향을 깨치는 방법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헤아려 보는 것, 그래서 그들의 인권을 생각하고 그들을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너와 내가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본 중의 기본 아닐까.


하태훈 교수 (고려대 로스쿨)
리걸에듀